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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규 광산구청장 |
그러나 선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민의 삶 속에서 작동하는 실천이다.
광주 광산구가 지난 8일에 전국 최초로 혐오 현수막의 내용을 판단하는 행정체계를 가동한 것은 혐오의 언어를 지역에서부터 적극 대응해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결단이다.
출퇴근길과 학교 앞, 시장과 도로변에 걸린 자극적이고 적대적인 혐오 문구는 인권 감수성을 좀먹으며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특정 집단을 배제하고 적대시하는 언어가 반복될수록 사회는 분열되고, 상생과 신뢰라는 민주주의의 기틀에 금이 간다.
민주주의는 선거라는 제도 하나로 유지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닦고 조이고 기름치지 않으면 고장 나는 자동차와 같다. 방치하면 멈추고, 무관심하면 방향을 잃는다.
혐오와 거짓, 차별의 언어를 그대로 두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서서히 무너진다. 민주적 절차로 집권한 나치, 그리고 12·3 비상계엄이 남긴 폐해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광산구는 중앙정부의 기준 제시 이전인 올해 1월부터 혐오 현수막을 선제적으로 철거해 왔다.
지금까지 철거한 혐오 표현 현수막은 150여 건에 이르고, 이를 게시한 일부 정당에 1672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명확한 기준이 없던 상황에서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해치는 행위에 정면으로 대응한, 사실상 유일한 사례다.
광산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옥외광고심의위원회 내에 전문가와 법률가가 참여하는 전담 소위원회를 구성해 현수막의 내용을 판단하는 공식 절차를 마련했다.
형식 요건만 보던 관행에서 벗어나 혐오·차별·허위 정보를 행정이 책임지고 판단해 대응하는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특히 광고 관련 교수 등 기존 위원 3명에, 법률 전문가 2명을 추가로 위촉해 공정성과 전문성을 대폭 강화했다. 이들 5명의 전문가는 내용 판단이 애매한 혐오 현수막에 대한 심의 요청이 들어오면, 24시간 내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는 전국 최초 원칙이다.
이를 통해 불법 현수막에 대한 ‘이중 정비망’을 완성한 것이다. 1차적으로 설치 규격을 어긴 현수막을 즉시 정비하고, 설령 규격은 지켰더라도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2차로 소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철거하는 방식이다.
이는 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해 혐오 표현을 일삼던 현수막들에 대한 사실상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현행 옥외광고물법은 일반 현수막에는 허가를 요구하면서도 정치활동 목적의 정당 현수막에는 예외를 인정한다. 일부 정당이 혐오 현수막을 거리로 내걸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러나 시민과 기업은 단속하면서 정당은 예외로 두는 행정은 공정할 수 없다. 법 앞의 형평성과 행정의 일관성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신뢰의 출발점이다.
혐오에 대응하는 기준은 결국 인권이다. 혐오는 약자와 소수자를 골라 공격하고, 이것을 방치되면 또 다른 먹잇감을 찾는 괴물이다.
이런 흐름을 외면하면 언젠가는 우리 자신이, 내 가족이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역사가 반복해 보여준 민주주의 붕괴의 경로다. 일상에 스며든 혐오를 더 이상 안일하게 둬서는 안 되는 이유다.
광산구의 혐오 현수막 대응은 단순한 단속이 아니다. 시민이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고, 감정적 언어에 휘둘리지 않도록 돕는 민주주의의 예방 장치다.
민주주의는 스스로 강해지지 않는다. 깨어 있는 시민과 책임 있는 행정이 함께할 때 비로소 작동한다. 혐오가 설 자리를 잃을 때 공동체는 다시 대화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품격은 그렇게, 일상의 공간에서부터 지켜가야 한다.
2025.12.21 (일) 2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