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 한계 탈피 독창적 세계 구축 ‘치유의 미학’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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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판화 한계 탈피 독창적 세계 구축 ‘치유의 미학’ 실현

[남도예술인] 노정숙 작가
전남 화순 작업실 머무르며 국내외 활발한 활동 펼쳐
고향 함평 시간과 5·18항쟁 기억들 예술적 성장 토대
한·프 오가며 판화 내외연 확장…작가 교류 산파역할

노정숙 동판화 ‘형形-84_죽은자의 무게’(1984)
노정숙 동판화 ‘혼배성사’(1988)
그의 작업실은 가톨릭에서 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로 본당 사목구에 속해 있는 공소 건물이어서 눈길을 붙잡았다. 이곳 전남 화순 도곡 공소를 1999년 매입해 올해 27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연초이기는 하지만 그는 평소 때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활동이 더 활발하다. 주인공은 회화로 출발해 판화로 그리고 설치와 미디어로 자신만의 독창적 작품세계를 다양하게 일구고 있는 전남 함평 출생 노정숙 작가(국제시각문화예술협회 대표)가 그다.

이처럼 두드러진 해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가는 서울과 광주, 화순이라고 하는 거점을 거치며 예술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화순 도곡 작업실은 광주 아파트 거주 시절에 온전히 작업하는 공간으로 모두 쓰였지만, 현재 공소 건물은 거주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공소 건물 건너에 작업실 건물을 지어 활용 중이다.

그의 고향은 함평으로, 예술가로서 발현해 온 감성과 정서의 밑받침이 된 곳이고, 광주는 작업방향을 정립하는 공간이 됐다. 특히 5·18항쟁의 직접적 체험은 그에게 두고 두고 사상적 편린을 자제하면서 진일보한 회화 세계가 무엇인가를 사유하는 등 끊임없는 사색의 근거로 작용했다.

1980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작가는 시위에 나섰던 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오빠가 귀가하지 않자 직접 찾으러 다니면서 골목 골목에 서린 5·18의 잔혹한 시대상황과 목도했다. 광주5·18항쟁의 트라우마는 나중에 그가 사실적 회화에서 반추상으로 방향을 선회한 계기가 됐다.

1986년 대학을 마친 후 서울로 상경해 판화에 집중했고, 전남대 조교 제안이 오자 1988년 광주로 내려왔다가 1990년 결혼을 하면서 다시 상경, 1993년 두번째 동판화 개인전을 서울 인사동 관훈갤러리에서 열었다. 1988년 동판화 개인전이 흑백대비의 표현으로 암울한 내용의 상징적 이미지를 활용한 울분의 표현이었다면, 두 번째 개인전은 희망과 치유로 다가선 내용으로 유채색을 활용한 다색판화로 이어졌다.

노정숙 동판화 ‘그림자 찾기1’(Discovering the shadows 1, 2008)
1980년대에서 1990년으로 넘어오면서 5·18항쟁 관련 내용의 판화는 이 시기에 멈추며 예술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장르로 접근한다. 회화와 설치, 북아트, 재생종이 운동 등을 펼친 것이다.

그녀는 한때 대학원 재학 등 서울 생활을 하다가 1997년에 다시 광주로 내려와 지금까지 판화에 대한 주변의 관념이나 편 가르기식 장르의 고정된 인식을 탈피해야 했다. 그는 판화의 감성과 매체의 특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초기 판화기법과 판화의 깊이 있는 효과를 마스터해야 특유의 물성에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기술을 가장 정확하게 배울 수 있으려면 흑백으로, 한 판이 아닌 두세 판을 같이 작업해야 깊이 있는 음영효과가 나옵니다. 동판화의 특징이 음영의 여러 단계의 깊이 있는 밀도와 선의 감각 그리고 동판의 거친 입자들이 그대로 반영되면서 물감을 머금고 찍히는 과정들이 매력이죠. 흑백의 농담과 밀도를 마스터하면 어떤 표현이든 자유롭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작가가 미술의 감성을 키운 텃밭은 고향이었고, 작업 안 사유의 방향이나 정신적 향방의 키워드는 아무래도 직접 목도했던 5·18항쟁의 기억들로 꼽을 수 있다. 크든, 작든 광주5·18항쟁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서사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그를 미술인으로 키운 사상적 토대는 고향의 시간과 5·18항쟁의 기억들이지만 초·중학교 때 각종 대회에서 연거푸 수상을 하는 등 미술환경을 수용하면서 성장해온 그는 중학교 무렵부터 미술부에서 활동했다. 판화를 가르쳐주는 곳이 따로 없어서 혼자 판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당시 고무판화와 목판화를 했는데 표현의 한계가 있었고 접근할수록 앎에 대한 호기심은 매우 컸다.

대학시절 서울에서 열린 ‘피카소’ 전시회 관람으로 석판화와 동판화로 된 작품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이런 자극들로 인해 그는 판화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열망으로 당시 국내 유일의 성신여대 대학원 판화학과를 진학하게 된 것이다. 그의 판화 인생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시기다. 판화학과에서 판화의 내외연을 확장시켰지만 더 배우고 싶은 갈망이 남았다. 그래서 일본 유학을 모색했다. 아버지의 긍정적 사인이 있었고, 문부성 장학금을 도전해보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문을 마치지 못해 우선 논문을 작성하는데 주력했고, 결혼을 하면서 일본 유학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2000년대 초에 프랑스 초대전을 계기로 프랑스로 거주를 옮겨 활동하고자 시도했으나, 어린 아이들 때문에 성사되지는 못했고, 아쉽지만 지금껏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예술활동을 진행 중이다.

그는 오로지 판화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달려왔다. 그런데 IMF시절부터 예술시장에서는 판화가 복제예술로 밀리는 예술 희소성의 문제로 열기가 사라졌다. 그래서 판화의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으며, 회화와 버금갈 수 있는 판화의 오리지널리티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특별한 판화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것이 다색 동판화와 응용판화였다. 그의 다색 동판화는 기존의 다색판화보다 더 많은 동판을 동원해 회화처럼 풍부한 색감으로 더 많은 색의 톤을 만들어 색과 색의 맑은 실루엣의 흐름으로 제작하는 것이 큰 강점으로 작용한다. 이는 해외에서 오늘날 많이 유통되고 각광을 받은 그만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응용판화는 천과 종이를 이용한 판화로 설치미술과 한지를 활용한 작품제작으로 기존판화의 한계를 넘고자 실험 중이다.

<>작가는 항상 자신의 예술세계에서 존재에 대한 탐구와 치유의 시간으로 ‘공백의 그림자’를 20년 동안 설정해 왔다. 공백의 그림자는 자신 속 내재된 생각을 비웠으나 또 하나의 흔적으로 남아 갑자기 도출돼 나타나는 이야기를 말한다. 그의 ‘공백의 그림자’ 시리즈는 20년 동안 회화와 판화에서 ‘그림자 찾기’로 다루고 있으며, 뉴욕과 일본 초대전을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특히 판화에서 많은 비중의 시리즈와 이야기를 담고 있는 판화는 인간의 갈등과 사랑 그리고 자연과 모성을 통해 ‘내가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하는가?’ 라는 동시대적 물음을 안고 치유로 풀어내고 있다.

수많은 경험을 축적하며 회화와 판화계를 넘나들며 활동을 펼쳐온 작가는 2005년 프랑스와의 교류 물꼬를 튼 이후 2007년 센마리팀 교류전 및 루앙대 학생들의 광주방문, 광주·프랑스 판화교류를 주도하는 유일 단체인 ‘꼬레라숑’(COREElation)과의 교류로 단체를 설립했으며,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에브흐시립박물관 초대 전시 등을 실현시켜 왔다. 그리고 최근 5년 사이 프랑스와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와 중국 항저우·심천을 중심으로 초대 개인전과 단체전, 트리엔날레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예술 역량을 크게 확대하고 있다.

앞으로 그는 자신의 예술영역을 확장하면서도 개별 네트워크를 통해 광주와 프랑스, 유럽과 중국을 이어나가는 등 작가 교류에 대한 산파역할을 꾸준하게 전개해 나갈 복안이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고선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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