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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유가족 등에 따르면 정부는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인쇄·배포와 광주 만세운동 준비를 주도한 공로를 인정해 김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애족장은 건국훈장 5등급에 해당한다.
김 선생은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소식을 국내에 연결하며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등사기를 직접 마련해 전남 장성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고, 광주 지역 청년 조직과 연계해 만세 시위를 준비하는 등 실행 단계까지 깊숙이 관여했다.
광주 만세운동은 장터를 중심으로 학생과 종교계, 청년단체가 결합한 조직적 시위로 확산됐다. 김 선생은 3월 10일 광주 시위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의사 면허를 취득해 고향 광주에 ‘남선의원’을 개원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가난한 환자에게 무료 또는 실비 진료를 실시하며 평생 민중을 위한 의료 활동을 이어갔다. 지역사회에서는 그를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로 불렀다.
해방 이후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도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냉전 체제 아래에서 남로당 관련 인물로 분류되면서 독립운동 공적이 온전히 평가받지 못했고, 그 여파로 수십 년간 국가 서훈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재평가의 계기는 지역 학계와 유가족의 꾸준한 자료 발굴이었다. 유가족과 박해현 초당대 교수 등 지역 역사학자들은 김 선생의 독립운동 기록과 재판 자료, 당시 지역 언론 보도 등을 지속적으로 발굴·정리해 공적을 입증해 왔다. 그 결과 3·1절 107주년을 맞은 올해, 김 선생을 비롯해 광주·전남 출신 독립운동가 9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박 교수는 “김범수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광주에 진입하자 처가가 있는 화순 원리로 피신했지만, 백아산 일대에 주둔하던 인민군 전남도당 사령부에 의해 강제로 징발돼 부상병 치료에 나섰다”며 “이념을 떠나 의사로서 환자를 살리려 했을 뿐인데, 훗날 이것이 좌익 활동으로 오해받으면서 서훈이 늦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범수 선생은 광주 3·1운동을 사전에 조직하고 실행 단계까지 연결한 핵심 인물이지만, 해방 이후 이념 갈등 속에서 역사에서 지워졌던 인물”이라며 “이번 서훈은 한 독립운동가 개인의 명예 회복을 넘어 지역 독립운동사의 빈칸을 바로 세우는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영진 기자 looks@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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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월) 1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