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지호 전남미술관장 |
오늘 세계의 도시들은 인공지능과 미디어아트, 거대 LED와 디지털 콘텐츠를 앞세워 ‘문화도시’를 자처한다. 첨단기술이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는 도구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기술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이다. 도시의 진정한 경쟁력은 그 도시만의 ‘장소성’에서 온다. 문화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Space and Place’에서 공간은 인간의 경험이 축적될 때 비로소 장소가 된다고 규정했다. 다도해의 풍경, 유배문화와 선비정신, 남종화와 수묵의 전통, 그리고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이 일군 민주주의와 인권의 유산까지, 어느 도시도 모방하지 못할 전남·광주 고유의 장소성이다. 이 자산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전남·광주 문화정책의 본질적 과제다. 세계의 어떤 도시도 이 두 결의 유산을 동시에 가진 곳은 없다. 전남·광주가 다른 도시와 차별화되는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 출발점은 연구다. 전남미술관은 남도미술과 수묵, 섬과 해양문화, 토착미술과 지역미술사를 체계적으로 조사·기록하는 연구기관으로서 기능을 재정립해야 한다. 문헌과 작품, 구술자료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고, 학술연구와 출판을 통해 남도미술의 학문적 기반을 축적해야 한다. 광주의 시민문화와 1980년 5월 민주항쟁의 기록, 구술 증언, 사진·문학 텍스트에 이르는 시민적 유산 분야에서도 동일한 수준의 조사·연구·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이 병행되어야 한다. 다만 연구는 그 자체로는 살아 움직이지 못한다. 연구는 반드시 창작으로, 창작은 시장으로 연결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생태계가 된다. 그 첫 관문인 창작의 인프라로서, 전남·광주는 전국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국제 공공 레지던시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목포·진도·해남·강진·완도·신안 곳곳에는 폐교와 빈집, 유휴 공공시설이 적지 않다. 이런 공간을 예술가들이 장기간 머물며 작품과 동시에 지역을 체험하는 국제 레지던시로 재생해야 한다.
핵심은 작업실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예술가가 지역 주민과 만나고, 오일장을 걸으며, 바다와 섬을 탐독하고, 남도의 역사와 문화를 몸으로 경험하는 시간 자체가 곧 창작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오는 8월 4일 전남미술관에서 개막하는 한불수교 140주년 기념 국제교류전 《두 도시, 하나의 불꽃》은 기존 레지던시의 개념을 넘어선 ‘공간 없는 레지던시(project without space)’ 프로젝트다. 전남·광주 지역작가 4명과 프랑스 작가 5명이 한 달간 광양과 순천, 남도의 시장과 마을을 직접 걸으며 연구와 제작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어 우리 작가들은 파리의 르원더(Le Wonder) 레지던시로 건너가 한 달간 작업을 이어간다. 이들의 작업 방식은 번역 그 자체다. 어떤 작가는 광양 오일장에서 생선 부산물을 가져와 냉동·기록하며 시간의 흔적을 시간예술로 번역하고, 또 다른 작가는 버려진 철과 폐기물을 모아 새로운 조형물로 환생시킨다. 어떤 작가는 한지를 직접 빚어 그 위에 버섯을 키우며 생명의 순환을 작품으로 만든다. 그들에게 오일장은 살아 있는 미술관이며, 버려진 사물은 지역의 기억을 품은 예술의 재료다. 우리는 너무 익숙해 지나친 풍경을 그들은 세계의 언어로 다시 읽어내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하나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 왜 외부 예술가들은 우리가 평범하게 지나치는 남도의 시장과 바다, 폐기물과 한지에서 동시대 미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예술은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머무름에서 태어난다. 한 달간 지역을 걷고, 사람을 만나고, 자연과 생활문화를 체험하는 시간이 곧 작품이 된다. ‘두 도시, 하나의 불꽃’은 전남·광주 문화정책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다만 창작만으로 생태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은 결국 시장과 만나야 하고, 시장은 작품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장치가 된다. 지금 전남·광주 문화정책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바로 이 시장이다. 예술가가 만들고, 미술관이 전시를 열어도 작품이 유통되지 못한다면 생태계는 곧 소멸한다. 이미 30여 년간 광주비엔날레는 자유와 시민성, 인권의 담론을 동시대 예술로 번역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국제 시장에 작품을 안정적으로 유통시키는 시스템과 여전히 완전히 연결되지 못했다.
따라서 전남·광주에는 광주비엔날레와 연계하는 국제 규모의 아트마켓이 절실하다. 가장 적합한 후보지는 여수엑스포단지다. 바다 풍광과 전시장, 컨벤션센터, 호텔과 숙박시설, 국제교통망, 해양관광 자원을 동시에 갖춘 여수만이 국제아트페어와 문화콘텐츠마켓을 병치 운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단, 전남·광주특별시가 지향하는 미술시장은 해외 유명 갤러리의 단순한 판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전남·광주에서 연구되고, 전남·광주에서 창작된 작품이 세계의 미술관·컬렉터·기업·기관과 실제로 연결되는 실질적 문화시장이어야 한다. 전남미술관은 연구·전시의 중심축, 레지던시는 작품 생산의 공장, 여수 아트마켓은 작품을 세계로 유통하는 플랫폼, 이 세 축이 맞물릴 때 비로소 연구·창작·시장이 선순환하는 문화예술 생태계가 완성된다. 한 발 더 나아가 민주주의와 시민성의 인식을 작품의 가치에 함께 반영하는 평가 체계가 이 시장 안에 자리 잡아야 한다. 비엔날레가 증언하고, 레지던시가 번역하고, 미술관이 기록한 시민적 가치를 시장이 가격으로 환산할 수 있을 때, 전남·광주의 문화는 비로소 세계의 언어로 응답하는 인문학이 된다.
영국 문화정책학자 찰스 랜드리(Charles Landry)는 ‘창조도시(The Creative City)’에서 “창조도시는 예술가가 살기 좋은 도시가 아니라 예술가가 계속 창작할 수 있는 도시”라 정의했다. 전남·광주 역시 이제 문화정책의 방향을 분명히 전환해야 한다.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정책에서 문화유산을 생산하는 정책으로, 시설을 건립하는 정책에서 예술가가 머무는 정책으로, 전시를 여는 정책에서 세계시장을 만드는 정책으로, 그리고 자연·예술의 유산과 시민·민주주의의 유산을 한 호흡으로 다시 쓰는 정책으로. 레지던시는 작품을 생산하는 문화공장이며, 아트마켓은 작품을 세계로 유통하는 문화시장이다.
조상들이 남긴 남도의 문화유산은 박물관 안에서 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1980년 5월, 시민들이 피워낸 민주주의의 기억 또한 기념관 안에 봉인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의 예술가들이 그것을 새로이 해석해 세계인이 공감하는 동시대 예술로 재탄생시킬 때, 비로소 그것은 살아 있는 유산이 된다. 예향은 과거의 이름이 아니다. 빛고을 또한 과거의 이름이 아니다. 세계의 예술가가 전남·광주에 머물고, 이 땅의 자연과 역사, 시민의 기억을 작품으로 묶어내고, 그 작품이 세계와 만나고, 그 성과가 다시 지역으로 돌아오며, 전남·광주의 청년들이 그 순환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는 때, 비로소 ‘예향 전남’, ‘빛고을 광주’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명품도시가 된다.
이지호 gn@gwangnam.co.kr
이지호 gn@gwangnam.co.kr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2026.08.13 (목) 1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