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마한금 그리고 가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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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그해 마한금 그리고 가야금

정선옥 더현음재 예술감독

정선옥 더현음재 대표
[기고] 해마다 12월이 오면 정례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약간의 설렘과 긴장으로 준비하는 각종 공모사업 지원이다. 이를 위해 1년 내내 생각을 다듬는다. 기획의도, 제목, 주제 선정, 구성과 형식, 함께 할 분야별 예술가들. 홍보에 쓰일 카피도 중요하므로 좋은 미디어 광고를 보면 새겨두고, 감동을 주는 신박한 글귀가 떠오르면 반드시 메모하는 버릇도 생겼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12월의 기획서는 지난 1년 열심히 다듬은 나의 조각이자, 내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활력소 창고가 되는 셈이다.

2011년 산조의 본향인 영암에서 우리가락 우리마당을 통해 시작된 활동은 돌이켜보면 필연적인 운명의 만남이었다. 42세 어느 날, 우연히 기찬랜드 김창조 야외공연장에서 만난 트로트 가수들의 공연을 보며 나는 영암이 가야금산조의 본향임을 떠올렸고, 영암 가야금이 영암 문화의 뿌리임을 널리 알려야 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고심의 끝이 결국 그동안 벌인 각종 공모사업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때부터 영암을 주제로 한 각종 기획 아이디어와 작품에 대한 구상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특히 영암의 숨은 가치와 잊혀져가는 문화유산들을 찾고,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영암 문화의 혼과 맥이 되어 준 ‘마한금’으로부터 지금의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도 버릴 수 없는 영암의 보물들이란 확신이 들었다. 훌륭한 영암의 문화 오브제를 오늘날 어떻게 새로운 작품으로 활용할 것인가가 나의 주된 관심사가 됐다. 이러한 고민들과 함께 ‘마한琴잇다-있다’, ‘달그득 아리樂’, ‘달人그리고 in’, ‘우리昌가를 부르게 하라’ 등 작품들이 해마다 새 생명을 얻게 되었고, 월출산 정기를 받은 새로운 유산으로 영암 땅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다.

내게 2024년은 어느 해보다 특별하다. 가장 힘들었지만 힘든 와중에도 나의 정체성과 나아갈 방향을 보다 정확히 설정했다. 그런 깨달음을 올해의 작품 ‘달人그리고 in’ 안에 잘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덕분에 영암에 뿌리를 내리게 됐지만, 내 의식 저편 어딘가에 2000년 전의 마한이 있었고, 그 어느 날 환생처럼 땅 속에서 마한금이 우리 곁으로 현신하면서 이런 소명의식은 더 굳건히 자리 잡게 되었다. 마한금이 내게 다가와 그 시절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올해 공연의 최고 성과는 마한금 복원과 연주, 그리고 잊혀질 위기에 놓인 갈곡리 들소리를 다시 익혀서 무대화시킨 일이다. 2000년 세월을 땅 속에서 썩지 않고 견뎌 준 이윤선 박사님이 처음으로 칭한 10현마한금은 올해 전남 문화재 연구소, 조준석 명장님과 함께 힘을 모아 마침내 복원에 성공했다.

단지 복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마한금을 다시 우리 생활 속의 악기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 김대성 작곡가께 곡을 위촉하여 ‘김창조-영보정 풍류’, 우리 고장 갈곡리들 소리를 주제로 한 ‘세화자’ 두 작품을 마한금 최초의 작품으로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그 옛날 마한 복장을 갖추고 마음금을 연주한 어린이 국악단의 연주를 처음 보았을 때 연주를 잘해준 고마움과 기특함, 그 감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침내 마한금이 다시 악기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마한금을 위해 작곡까지 완료되어 어린이 국악단원들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연주되던 날, 그 동안의 고생과 보람이 겹쳐 눈물이 났다.

‘세화자’라는 작품 또한 신기한 경험이었다. 사실, 세화자 작품을 받기 전에 이미 갈곡리 들소리는 3월부터 우리 공연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 8월 들어 김대성 작곡가께 세화자 작품을 받게 되었는데, 그 초연곡이 갈곡리 들소리를 테마로 한 곡이라니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겠는가.

더현음재의 세화자는 우리를 잠시 마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만든 시간이었다. 그 시절 마한사람들처럼 땅을 밟고, 두 손을 맞잡아 춤을 췄던 마한의 5월제와 10월제 축제의 시간으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간 듯 했다.

가야금 산조의 뿌리도 이 땅을 살았던 우리 민중의 음악이 아니겠는가. 우리 민속 음악의 뿌리가 되었던 노동요 음악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갈곡리 들소리’가 그대로 사라지게 둘 수 없었다. 이번 무대는 갈곡리 들소리 보존회 회장님과 회원들, 그리고 더현음제 어르신과 학생 단원들, 임상욱소리터 대표 등 많은 사람이 함께 이룬 뜻 깊은 합동 작품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이런 의미있는 작품들을 계속해 만들어 나갈 것이다. 가야금 연주는 물론이고 영암의 소중한 문화자산을 지키고 보전하며 가야금과 함께하는 융복합 콘텐츠를 계속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길게 이어 기꺼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일을 언제까지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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