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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지범 국립순천대 농업경제학과 교수 |
최근 일본 홋카이도의 작은 지자체 히가시카와를 방문했다. 인구 8000명 남짓의 농촌이지만 일본 내에서는 인구가 늘고 청년 이주가 활발한 ‘예외적인 지역’으로 평가된다. 이 지역의 차별성은 ‘고향 납세’를 단순한 재원 확보가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잇는 ‘관계 자본’을 쌓는 장치로 활용해 왔다는 점에 있다.
히가시카와에서 기부자는 일회성 ‘고객’이 아니라, 지역의 소식을 꾸준히 나누는 ‘이웃’으로 대우받는다. 기부금은 장학사업, 사진문화학교, 예술 프로그램, 이주 정착 지원 등 미래 인구 기반을 키우는 분야에 우선 투자되고, 사용 내역과 성과는 정기적으로 기부자에게 공유된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받은 것은 돈이 아니라 관계와 신뢰”라고 말한다. 작은 기부가 지역정책의 플랫폼이 되고 공동체 분위기까지 바꿔놓은 사례다.
우리의 고향사랑기부제도의 기본 구조도 유사하다. 거주지 외 지자체에 일정 한도 내에서 기부하면 세액공제와 답례품을 제공하고, 지자체는 그 재원을 활용해 지역 사업을 추진한다. 제도 설계만 놓고 보면 지역 재정 확충, 시민 참여, 지역상품 판로 확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도입 초기인 지금, 이 제도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지역의 내일을 여는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 고향사랑기부제를 단순한 ‘재정사업 항목’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정책 실험의 그릇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기부금을 여러 행사 예산에 흩어 쓰기보다 청년 정착·돌봄·교육·마을 인프라 등 핵심 분야에 전략적으로 집중할 때 제도의 효과는 분명해진다. 지자체가 매년 고향사랑기부금 운영계획을 세우고, 어떤 변화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주민과 기부자에게 투명하게 제시한다면 기부는 자연스럽게 지역의 미래와 연결된다.
답례품 경쟁의 과열을 겪은 일본의 경험도 참고할 만하다. 답례품은 필요한 요소이지만 제도의 무게 중심이 세제 혜택과 물질적 보상에만 쏠릴 경우 본래 취지가 흐려질 수 있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누구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한 성과와 이야기가 함께 전달될 때, 고향사랑기부제는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기부 효과를 보여주는 방식도 중요하다. 기부금이 어느 사업에 얼마 쓰였는지를 넘어서, 몇 명의 아이가 장학 지원을 받았는지, 어떤 청년 팀이 창업에 도전했는지, 어떤 마을의 돌봄 서비스가 개선되었는지를 정량·정성 지표로 함께 제시할 때 시민들은 이 제도를 보다 신뢰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작은 기부가 지역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는 경험 자체가 고향사랑기부제의 의미를 풍부하게 한다.
고향사랑기부제는 시민에게는 크지 않은 선택일 수 있지만 지역의 시간으로 보면 재정 구조와 거버넌스, 공동체의 회복력을 서서히 바꾸는 신호가 될 수 있다. 농촌과 중소도시에서 청년 유입과 정착을 고민하는 지자체가 이 제도를 청년정책·주거·일자리 정책과 연계해 활용한다면 기부금은 일회성 수입이 아니라 지역의 미래를 위한 투자로 기능할 것이다.
작은 기부가 만드는 변화는 결코 작지 않다. 제도 설계자는 그 잠재력을 살리고, 지자체는 각 지역의 사정을 반영해 전략적으로 운영하며, 시민은 이 제도가 만들어 내는 변화를 함께 지켜보며 공감의 폭을 넓혀갈 수 있다.
그렇게 제도와 지역, 시민이 서로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설 때, 고향사랑기부제는 단순한 세제 혜택을 넘어 지역을 살리고 고향의 내일을 열어가는 따뜻한 장치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2025.11.25 (화) 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