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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식민지역사박물관 명예관장인 심정섭씨가 28일 ‘이화명충 구제 지도원 임명장’과 ‘소나무 쐐기나방 유충 공동 구제 출역 통지서’를 본보에 독점 공개했다. 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
28일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식민지역사박물관 명예관장인 심정섭 사백(82·광주 북구)은 ‘이화명충 구제 지도원 임명장’과 ‘소나무 쐐기나방 유충 공동 구제 출역 통지서’를 본보에 독점 공개했다.
일본은 중일전쟁 이후 식량 공출을 본격화하면서 조선 농민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쌀 공출 비율은 1941년 전체 생산량의 41%에 달했고, 1944년에는 46%까지 치솟았다.
일제는 부락 단위로 생산 할당량을 강제 배정해 농민들의 생존 여부와 상관없이 쌀을 수탈했다. 이로 인해 조선 농민들은 해마다 1000만석이 넘는 쌀을 빼앗겼고, 대신 만주에서 들여온 콩깻묵이나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다.
이 같은 실상을 증명하는 자료 중 하나가 심정섭 명예관장이 공개한 ‘이화명충 구제 지도원 임명장(가로 19.3㎝, 세로 26.8㎝)’이다. 전북 부안군 이화명충구제조합은 1939년 5월25일 부안에 거주하던 최병수를 이화명충 구제 지도원으로 임명하며 하루 수당 3원(현 3만원)을 지급한다고 명시했다.
이화명충은 벼 줄기를 갉아먹는 해충으로, 한 해 두 차례 성충으로 우화해 방제하지 않으면 수확량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일제는 식량 증산을 명분으로 구제 작업을 강요했지만, 실제로는 늘어난 수확물 대부분을 공출로 빼앗아 갔다.
심 명예관장은 “조합에서 농약을 지급해 벼농사를 지었지만 농민 대부분이 소작인이었고, 지주와 식량 공출로 인해 수확의 과실은 농민에게 돌아오지 않았다”며 “이 같은 실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백강 조경한 선생(1900~1993)에게 직접 들은 증언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이화명충 구제 지도원은 구장과 면장의 추천을 받아 일본 순사의 심사를 거쳐 임명됐으며, 학비 감면이나 노역 면제, 일본 유학 편의 제공 등 각종 특혜를 누렸다. 그 이면에는 친일 협력 구조가 공고히 작동하고 있었다.
또 다른 자료인 ‘소나무 쐐기나방 유충 공동 구제 출역 통지서(가로 17㎝, 세로 13㎝)’는 강제 노역의 실태를 보여준다. 경남 울주군 웅촌면장은 1930년 5월28일 웅촌면 석천리에 거주하던 이일수에게 해당 통지서를 발송했다.
통지서에는 1930년 6월 2~8일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본인 감독자의 지휘 아래 공동 구제 작업에 출역(강제 노역)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출역 인원은 12명으로, 작업 장소는 석천리 소나무 군락지였다.
주의사항에는 △매일 통지서를 휴대할 것 △무단 불참 시 100원(현재 가치 약 100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 △대나무 칼이나 가위, 석유 빈 깡통 지참 △출역 대상은 15세 이상 60세 이하, 남녀 불문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감독자는 일본인이었고, 순사가 동행해 감시·통제하면서 현장은 극도의 공포 분위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심정섭 명예관장은 “일제는 소나무 쐐기나방 유충 공동 구제를 산림 보호와 녹화를 위한 조치라고 선전했지만, 실제 목적은 군수용 석유 대용으로 쓰기 위한 송진 채취에 있었다”며 “이화명충 구제로 쌀 농사는 풍년이 들었지만, 식량 공출로 조선인들은 더욱 굶주렸다”고 말했다.
임영진 기자 looks@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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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6 (금) 20: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