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전병원 대한민국 패션디자인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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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전병원 대한민국 패션디자인 명장

"옷은 곧 품격…충장로 양복기술 집대성 하고파"
16세 때 업계 첫 발 '48년' 한길…호남 최고 기술자로
1987년 양복점 문 열어…7전 8기 끝에 명장 반열 올라
충장로 터전 지켜온 상인들 이야기 '오래된 가게' 펴내

전병원 대한민국 패션디자인 명장이 광주 동구 충장로에 위치한 전병원양복점에서 자신이 직접만든 양복 상의를 점검하고 있다. 최기남 기자
누구나 옷장을 열면 꼭 한 벌 이상씩 갖추고 있는 옷이 있다. 바로 ‘양복’이다.

굳이 매일 양복을 입는 직장인이 아니더라도 관혼상제를 중요시하는 대한민국의 풍토로 인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양복 한 벌 쯤은 반드시 구비해 놓는다.

즉, 양복은 ‘예의범절’과 함께 입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 더 크게는 그 사람의 ‘인격’을 보여준다.

광주 동구 충장로에서 48년 동안 그 ‘인격’을 완성해 주는 명장이 있다.

바로 호남지역 최초 대한민국 패션디자인부문(양복) 명장이자 올해로 34년째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병원양복점’을 지키고 있는 전병원 명장(64)이 그 주인공이다.

전병원 명장의 양복과 인연은 16살이던 1972년 시작됐다.

전 명장은 중학교 2학년까지 고향인 영광군 묘량면에서 보낸 뒤 광주로 강제 유학을 와야만 했다. 급격히 가세가 기울면서 당장은 학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고등학교에 진학할 것으로 생각했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고,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광주·전남을 넘어 당시 호남 최대 번화가인 ‘충장로’ 행을 권유했다.

지난 7월 광주 동구 충장상인회가 발간한 ‘충장로 오래된 가게’ 책을 임택 동구청장에게 전달하고 있다.
“한참 뒤 어머니에게 들었지만 이미 어머니는 ‘학업중단’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기 앞서 일주일 가량 충장로를 사전답사하셨데요. 금은방, 자동차 정비소, 금형업체, 이발소, 포목점 등을 돌고 점포 사장을 만나 얘기하면서 아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걱정하신 거죠.”

당시 충장로 4~5가에는 양복점, 양장점, 제화점, 금은방, 한복점, 이불점, 이발소, 자동차 정비소, 식당 등 수 많은 점포들이 들어선 상태였고, 어머니는 이 중 충장로 4가에 있는 ‘대성양복점’을 콕 찝어 아들을 데려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부분 작업복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쓰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양복점만 쫙 빼입은 양복에 멋스런 넥타이까지 매고 근무하는 모습을 어머니가 매력적으로 느끼신 것 같아요. 그렇게 1972년 1월부터 양복과의 인연이 시작된 거죠.”

하지만 꿈이 있고 원해서 하게 된 양복쟁이 생활이 아닌 터라 전 명장은 그저 선배들이 시키는 것만 소극적으로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기 일쑤였다. 당연히 그는 적당히 지내고 500원 씩 주는 월급만 받다가 다시 공부해 고교에 진학할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늘과 실 보다는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그런 그가 입사 9개월 후엔 누구보다 양복에 심취하며 양복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됐다. 그해 9월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세계기능올림픽 양복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장면을 본 것이다.

전국의 명장들과 사진촬영
“굳이 공부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와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알게 됐죠. 당시 그 장면은 나를 명장으로까지 이끈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그 한 장면은 전 명장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우선 옆구리에 끼고 살던 책을 치웠고, 바늘과 실을 집어 들었다. 낮에는 선배들의 심부름을 하며 어깨 너머로 기술을 익혔고, 밤엔 잠을 쪼개며 자신만의 ‘양복’을 만들어 갔다.

양복기술에도 단계가 있다. 모두 처음엔 심부름으로 시작한다. 이후 바지를 만들고 조끼, 상의, 외투 순이다. 이 모든 기술을 익히면 턱시도와 같은 연미복 만들기로 양복기술을 완성한다.

대개 이 기술을 습득하는 데만 5년 가량이 걸린다. 하지만 전 명장은 이를 2년 앞당겨 3년만에 익혔다. ‘호남 최고 양복기술자’라는 목표를 정한 뒤 모든 것을 쏟아부은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간을 쪼개 기술을 익혀오던 전 명장은 이내 한계에 봉착, 소수문 끝에 광주에서 가장 유명한 양복점인 충장로4가의 태화양복점을 찾아가 재단과 점포 경영 등 자신에게 부족한 기술을 연마해 갔다.

“해방 이후 지역 대표 양복 최고 기술자인 대흥양복점의 김백운 대표로부터 런던양복점 정병모 대표가 기술을 전수받았고, 그의 수제자인 태화양복점의 신영남 재단사가 저에게 양복기술의 정수를 전수했어요. 어찌 보면 저는 광주 양복사에서 4세대인 셈이죠.”

또 쉴때면 광주를 벗어나 서울,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양복기술로 정평이 난 사람들에게 기술을 배우고 싶다며 편지를 쓰고 직접 찾아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갔다.

그렇게 양복의 세계에 입문해 전국을 돌며 기술을 배우고 익힌 지 16년이 되자 전 명장의 명성은 충장로 전역에 알려지게 됐고, 1987년 자신의 멘토였던 태화양복점이 문을 닫자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병원양복점’을 열었다.

양복변천100년사 전시회를 알리는 현수막
이미 충장로 제일의 양복기술자가 개업을 했다는 소식에 손님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매달 150벌 이상이 전 명장의 이름을 달고 팔려나갔다.

특히 광주에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옷을 걸치기 위해 줄을 서기도 했다.

바쁜 나날 속에서도 자신이 사랑하고 업으로 삼고 있는 양복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쉼 없이 달려갔다. 실제로 1993년 자비로 ‘한국양복변천100년사’ 전시를 광주, 서울, 부산 등을 돌며 7차례에 걸쳐 개최했다.

“‘한국양복변천100년사’가 개최된 1993년은 양복이 국내에 들어온 지 정확인 100년이 되는 해였어요. 그 전시회를 통해 양복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이를 통해 의류산업의 미래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열게 된 거였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기술을 전수했다. 스승인 태화양복점의 신영남 재단사가 아무런 대가없이 기술을 전수해 줬던 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젊은 시절 봉재작업 중인 전병원 명장
또 1995년부터는 광주와 목포교도소를 다니며 제소자들의 사회정착을 위해 직업개발훈련에도 매진했다. 전 명장으로부터 기술을 사사받은 제소자들이 출소 후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후 1997년 IMF 사태와 함께 저렴하게 입을 수 있는 기성복이 대거 유입되면서 손님들의 발길로 줄기 시작했고, 의도치 않게 시간적 여유가 생긴 전 명장은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바로 ‘대한민국 명장’의 꿈이었다.

이미 양복기술을 완성됐다고 자부했던 터라 내심 기대를 걸었고, 2002년 첫 도전에 나섰지만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셨다. 이유인즉, 미흡한 ‘공적조서’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리 7번의 실패를 맛본 뒤에야 전 명장은 꿈에 그리던 ‘명장’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다.

“당시엔 당연히 될 것으로 생각했죠. 하지만 공적조서를 작성하는 부분에서 미흡했어요. 어찌보면 오만했던 것 같아요.”

각고의 노력 끝에 양복 분야에서 명장의 반열에 오른 그였지만 여전히 도전정신은 계속됐다. 자신이 평생을 함께해온,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해야 할 ‘충장로’ 지키기에 도전한 것이다.

충장로 태화양복점에서 근무중인 전병원 명장
호남 최대 번화가였던 충장로는 IMF에 이어 2005년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이전하면서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이에 전 명장 등 충장상인회가 주축이 돼 30년 이상된 점포 63곳을 선정, ‘오래된 가게’라고 적힌 동판을 제작해 가게 앞 도로에 내걸고, 이들 가게의 연혁 등을 인터뷰해 책으로 묶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하면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충장로는 한복, 양복, 귀금속, 안경 등 많은 대가들의 삶이 녹아있는 터전이에요. 이곳이 간직한 역사적 스토리는 문화이자 거대한 관광산업이요, 이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어요.”

환갑을 훌쩍 넘긴 전 명장은 앞으로도 도전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말한다.

“명장이 되면서 함께 고락을 해온 충장로의 다른 대가들 역시 명장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들이 나아가는 길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또 양복쟁이인 만큼 이를 총 집대성한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요. 충장로의 양복기술이 전국 양복쟁이들의 목표가 되면 어떨까요.”
송대웅 기자 sdw0918@gwangnam.co.kr        송대웅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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