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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수 광주연합기술지주 대표 |
우리가 아무렇게나 써서 그렇지, 살벌(殺伐)한 말이다. 아무리 영어를 좋아해도 함부로 쓸 말은 아니다.
서바이벌은 목숨과 나라를 지켜야 할 때 써야 맞다. 하지만 내 목숨과 내 나라를 지킬 때도 ‘너 죽고 나 살자’의 끔찍함보다 ‘함께 잘 살자’는 아름다움이 더 좋다.
그때만 좋은 게 아니라, 영원히 좋은 것이 ‘함께’다. 함께는 더 나은 길을 찾는 일이고, 평화의 다른 말이다.
치열한 서바이벌과 달리 상생(相生)은 좀 느긋하다. 서로 도와야 하고, 도우려면 서로 알아가야 하니까. 느긋하지만 치밀해야 하고, 제 몫을 하면서도 서로를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입으로만 떠들고, 마음으론 밥그릇 싸움만 한다. 정치판이든, 시장통이든, 사이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종교인들이 틈만 나면 입에 올리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길은 ‘함께’에 있다. 그런데 왜 종교전쟁이 터지는지는 모르겠다. 설마 종교인들이 사랑과 자비를 강요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건 아닐까? 짝사랑으로 혼인하기 어렵고, 외사랑으로 소통할 수 없다.
경제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효과와 가치 또한 ‘함께’ 해야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왜 경제인들만 행복한지 모르겠다. 설마 ‘함께’ 해낸 일을 경제인만 꿀꺽하고 나누지 않는 건 아닐까? 나라의 행복지수가 나의 행복지수가 될 수 없고, 경제인의 행복지수가 서민의 행복지수는 아니다.
정치인들이 떠들어대는 발전과 화합도 같이 노력하고 ‘함께’ 누려야 한다. 그런데 왜 정치인들만 대접 받고 사는지 모르겠다. 설마 노력은 서민들만 하고, 정치인은 누리기만 하는 걸까? 발전은 누군가를 착취해서 얻어서도 안 되고, 특정인만 평화를 누려서도 안 된다.
종교인이든 경제인이든 정치인이든 아름다운 말을 쓴다. 사랑받으려고! 현실에 부닥치면? 잇속을 좇고, 살길을 찾기 쉽다. 죽음과 전쟁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때도 그랬고, 한국전쟁 때도, 경제가 바닥칠 때도 그랬다.
무한경쟁의 서바이벌을 상생으로 바꿔야 한다. 패배자가 나가떨어져야 끝나는 전쟁사회를 멈춰야 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경쟁은 어쩌면 바꿀 수 없는 숙명이지만, 경쟁에 상생을 집어넣어 우리 사회를 바꿔내야 한다.
무작정 경쟁만으로 1, 2, 3등을 뽑는 틀을 바꿔야 한다. 경쟁으로 잘하는 사람들을 뽑았다면, 멘토를 붙여 더 잘할 수 있도록 돕고, 잘하는 사람끼리 서로 도울 수 있는 환경으로 발전을 끌어가야 한다.
겨뤄본 사람끼리는 누가 더 잘 해낼지, 어떻게 도와야 더 잘하게 될지 안다.
이러한 단계를 여러 차례 거치면 솜씨가 더 꼼꼼해지고, 사람들이 더 찾게 된다. 더 나은 솜씨가 나오고, 마침내는 당장 내놔도 손색이 없는 상품(기술)이 나온다. 물론 상금은 동기를 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실패했더라도 팽개치고 버려둘 일도 아니다. 왜 실패했는지,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기회를 줘야 한다.
재도전의 기회는 새로운 야망을 불태우게 한다. 교육에서든, 시장에서든! 가수 임재범의 ‘너를 위해’, 남궁옥분의 ‘재회’와 이범학의 ‘이별 아닌 이별’도 다시 다듬어서 큰 인기를 모은 노래다.
이러한 ‘경쟁 속 상생’을 통하면, 기업은 적은 투자로 좋은 상품을 얻을 수 있고, 도전자들은 꿈을 실현할 수 있으며, 세상은 열정을 담아 도전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경쟁 속 상생 방식은 시간이 길수록 완성도가 높다. 다투어 이기는 방식 같지만 서로 살리는 전략이다.
경쟁으로 서로 도움이 되고 더 빛나는 솜씨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전략의 상수는 서로 이기는(윈-윈) 전략이고, 전략의 하수는 경쟁 때문에 서로를 적으로 돌려세우는 일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전략은 경쟁 속 상생이다.
‘죽기 살기’로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것보다 ‘함께’ 살아야 한다. ‘너 죽이고 나 살기’로 서로 무너뜨리기보다 ‘서로 살리기’로 나아가야 한다.
그 길을 찾는 사람이 지도자이고, 영웅이고 선지자다. 전우익 선생이 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글묵(책)을 다시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