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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빛고을문화 편집주간·시인 |
8살 한강은 스스로에게 묻고 답했다. 지난 7일 오후 5시(현지 시각) 스웨덴 스톡홀름 한림원.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54) 작가는 특별 강연을 통해 지난 31년간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았다. 그는 1979년 4월 여덟 살 때 쓴 ‘천진하고 서툰’ 시(詩)로 강연의 문을 열고 닫았다.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작가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 것-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金)실- 빛을 내는 실. 그 후 14년이 흘러 처음으로 시를, 그 이듬해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한강은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5년이 흐르고 3년에 걸쳐 완성한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작가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 된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작가는 좋았다.
한강은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로, 한국의 역사와 그에 대한 상처에 몰두하는 방식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것은 저 너머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였고 현대사의 비극적 트라우마를 작가 특유의 시적 문체로 풀어 나간 작품들이었다. ‘사용 인구가 채 1억이 되지 않는 한국어로 집필 활동을 해온 소설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더없이 소중한 의미이지만 지금의 기쁨을 미래의 메시지로 남기는 것은 더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작가는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평균 연령에 못 미칠 만큼 젊다. 제2, 제3의 한강을 꿈꾸는 문학도들에게 ‘희랍어 시간’을 비롯한 그의 소설은 인간 내면의 외로움과 상처가 어떻게 치유되고 희망이 되는지 보여준다.
- 소설을 쓰며 나는 묻고 싶었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해마다 이맘때쯤 교수신문은 전국 교수들의 설문조사로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한다.
올해는 ‘도량발호’(跳梁跋扈)를 선정 발표했다. 뜻은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뛰다’쯤으로 새겨질 것 같다. 지금 어둠이 내려 차가운 세모의 거리 곳곳은 함부로 날뛰던 세력을 향한 분노의 함성으로 가득하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전체 사회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계엄 사태를 목도하면서 충분히 느꼈다. 철학과 인문적 사고력이 결여된 지도자의 죄의식 없는 망상이 숱한 사람들을 절망케 하면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한다.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문학적 성과 외에도 현재와 과거 역사적 사건들의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에게 참 따뜻한 위로를 주었다. 세계문학의 지도를 그린다면 그 지도 속에 ‘한국’은 어디쯤 있을까? 수사적 의미의 수치보다는 그동안 우리 문학의 성과 역량 수준 자체를 생각해 보자. 독자의 규모, 작품의 상업적 판매량, 대중적 독서시간, 작가의 인지도 등. 우리 문학의 대외 위상은 문학작품에 대한 번역과 해외 출판 지원을 위힌 정책적 노력이 밑받침되어야 한다.
문학은 상품 경쟁력, 기술 경쟁력을 잴 때와 동일한 잣대로 재단 할 수 없다. 우리 문학이 해외 독자의 독서 시간을 점유하려면 원작의 수준, 번역의 수준, 유통의 뒷받침 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다양한 부문에서 한국 문화를 지켜보며 환호하던 이들에게 스톡홀름 시청사에서 밤을 밝힌 노벨 주간의 조명은 얼마나 아름답고 벅찬 일이었을까. 1909년 수상자 셀마 라켈로프 부터 올해 한강 까지 여성 문학가들의 초상을 담아 제작했다는 스테인드글라스 형태의 조명작품을 떠올리면 한강의 어린 날 가슴에서 빛나던 금실이 지금 우리에게도 빛을 내면서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