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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당금 예술이 빽그라운드 대표 |
앓고 나서 세상은 밤,
나의 눈은 더 깊어져서 고되고 벅차다
돌아가는 길은 늘 침묵이 지배하니까 나의 푸른 잎은 여전할 뿐(박노식 시인의 시 중 일부)
연극은 언제나 어둠에서 시작한다.
모든 조명이 꺼지고, 소란의 잔향이 사라진 자리에 침묵이라는 빈 공간이 펼쳐진다.
막이 오르고 배우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 빈 공간은 비로소 다시 세계가 된다.
어둠 속에서 세계를 다시 여는 것, 그것이 연극이다.
무대 위의 첫 등장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등장(appearance)’과 닮아있다.
배우의 등장은 세계 즉 관객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예술가는 바로 그 순간 세계와 접촉하고 존재를 실현한다. 그러나 세계 앞에 서는 이 행위는 동시에 무방비의 순간이기도 하다. 예술가는 자신의 불안과 상처, 사회적 문제를 예술로 표현하며 그 과정을 성찰과 변화의 계기로 삼는다. 하지만 그 드러냄은 항상 위험을 동반한다. 타인의 시선, 특히 대중의 시선은 예술가의 내밀한 탐색을 손쉽게 ‘평가의 언어’로 바꿔버린다. 그 순간 예술가가 구축한 고유한 언어는 외부의 해석과 판단에 압도되며, 예술가는 자신을 지킬 여유조차 갖지 못한 채 흔들리며 존재의 가장 끝자리까지 몰리기도 한다.
최근 공연 작업에서 불가피한 결정을 내리며, 그 결정이 외부 시선에 의해 어떻게 재해석 되고 확대되는지를 분명히 경험했다. 결정은 내부에서 신중하게 내려졌고 그 이유도 명확했지만, 노출되는 순간 사회적 시선은 결정의 옳고 그름을 넘어 그 결정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동일하게 판단하게 된다는 것을! 옳은 결정이라도, 시선이 집중되면 도덕적 판단과 무관하게 평가된다. 이것이 예술가가 쉽게 흔들리는 이유이며 동시에 예술가가 사회의 감각기관이 되는 이유다. 예술은 사회의 공공적 거울이다. 그러나 그 거울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예술가가 받은 상처와 감당해야 하는 위험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예술가의 흔들림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예술 생태계의 구조적 취약성과 맞닿아 있다.
문화예술 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지역과 순수예술을 뒤로 밀어둔다. 대중문화예술은 산업의 이름으로 성장하지만 순수예술과 지역예술은 생존의 언어를 말해야 한다. 지원은 있지만 기반은 없고, 정책은 말하지만 책임은 예술가에게 남는다. 예술은 산업 이전의 언어이며, 예술가는 사회의 감각적 균형을 유지하는 최전선에 서 있다. 사회가 감지하지 못한 진동을 번역하는 사람들 또한 예술가다. 지역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국가가 돌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공동체의 감각을 지키는 일이다. 지역의 극장과 전시장 같은 문화공간은 도시의 기억과 질문을 품는다. 예술의 뿌리는 언제나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자란다. 그럼에도 지역예술은 후순위로 밀리고, 예술가는 서류를 시작으로 기획·운영·홍보까지 홀로 감당하며 도시의 감정적 역사와 정체성을 붙든다. 대중이 예술을 향유하지 못하는 이유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부재다. 예술을 경험하지 못한 시민은 예술을 이해할 언어도, 예술가의 고통을 감각할 단위도 갖지 못한다. 예술교육은 선택이 아니라 시민이 세계를 감각하는 첫 번째 학습이어야 하며, 문화 선진국은 학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가 흔들리면 예술도 흔들리고 개인이 아프면 예술도 아프다. 그래서 예술은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는 고립되거나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가가 감당해야 하는 그 ‘시선의 무게’는 특정 사건이 아니라 사회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맨 앞에서 감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무게이기 때문이다.
아, 비록 세상이 밤일지라도 그 어둠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예술가의 눈이 살아 있는 한 우리 사회의 푸른 잎은 끝내 마르지 않을 것이다.
2025.11.21 (금) 0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