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도시가 간직한 빛과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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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빛의 도시가 간직한 빛과 그늘

백승현 대동문화재단 전문위원

백승현 대동문화재단 전문위원
[문화산책]무등산을 등반하면서 의재 허백련 선생의 춘설헌에 들러보면 잔잔한 기쁨이 인다. 남종화의 대가 의재 선생은 말년에 춘설헌에서 제자들과 차를 마시며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한다.

“제자들은 철을 가리지 않고 찾아와 준다. 그들은 춘설헌 남향 방에 누운 나를 보고, 나는 그들에게 춘설차 한 잔을 권한다. 나는 차를 마시고 있는 그들을 보며, 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 향기로웠던가를 생각하고 얼굴을 붉히곤 한다.”

예술가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의재 선생은 그렇게 이야기하셨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는 모든 이들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드는 말이다.

춘설헌 계곡 맞은편에 의재미술관이 있는데, 여기 전시된 어떤 의재 선생의 대작들보다, 미술관 벽에 걸려 보존되어 있는 의재 선생 지팡이가 더 우러러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재미술관은 현대적 건물인데도 불구하고 춘설헌과 어울려 자연과 어울린 건축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연을 사랑했던 의재 선생의 겸손과 소탈함을 닮았다는 절실한 감정이 든다.

프랑스는 세계 1위의 관광 대국이다. 파리의 관광 명소는 에펠탑, 개선문,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 베르사유 궁전 등이다. 역사 예술 건축이 살아 숨 쉬는 생동감이 넘치는 도시다. 파리는 ‘빛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가 관광 대국이 된 것은 말로법이 하나의 요소가 됐다. 1962년 제정된 이 법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앙드레 말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법률로, 프랑스 역사 유적 보존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 법의 핵심은 개별적인 역사 기념물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역까지 포괄적으로 보호·관리하는 적극적인 방식의 보존 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역사적인 도시 경관과 문화유산 전체를 총체적으로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역사적, 심미적 가치가 인정되어 보전이 필요한 구도심 전체를 보존 지구로 지정해서 보호한다. 역사적 맥락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보존 및 가치 제고 계획’이라는 특별한 도시 계획 문서를 수립해서, 건축 행위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역사적 특성에 맞는 복원 및 관리를 유도한다.

말로법을 읽어보면 왜 프랑스가 관광 대국인지를 알게 된다. 개발과 보존이라는 가치가 충돌할 때, 도시 경관과 문화유산의 보전이라는 가치를 우선하는 프랑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문화유산의 훼손을 처벌하는 규정이 있었을까.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엄격했다. ‘경국대전’에는 왕릉, 묘, 사당 등 국가의 신성한 공간을 훼손하는 행위에는 참수, 교수에 처해지고 주변 시설물을 훼손해도 유배나 장형 등 중형에 처했다. 능묘 주변에서 소나무나 나무를 함부로 베는 행위, 심지어 우연히 훼손한 경우도 엄하게 다스렸다.

왕이 거처하는 궁궐이나 국가의 주요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 건물을 훼손하는 행위 역시 국법을 어기는 행위로 간주되어 장형 또는 징역형에 처해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 등을 훼손하는 행위 등 조상들이 남긴 유산을 훼손하는 것은 대역죄에 해당됐다. 조선의 이런 법제 시스템 때문에 서울은 지금 궁궐, 북촌 한옥마을, 익선동 한옥거리, 남대문 숭례문이 보존되게 되었다. 한류 관광지로 세계인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조선 왕실의 신위를 모신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며 그 역사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 받았다. 최근 종묘 주변에서 벌어지는 보존과 개발 논란은 우리가 과연 선조들의 유산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국가유산청의 ‘역사환경 보존에 관한 법률’과 서울시의 관련 ‘조례’가 충돌하며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정치적 이유라는 암초를 만나 이 세계적인 유산인 종묘가 보존과 개발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있는 것이다.

‘빛의 도시 광주’ 심장부에 위치한 옛 전남방직·일신방직 부지 개발 사업은 단순한 부동산 개발을 넘어, 광주의 산업 유산 보존과 도시 미래 공간 조성이라는 두 가지 핵심 가치가 충돌하는 현안이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광주와 호남 경제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수많은 노동자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 공장의 건물, 굴뚝, 창고 등은 근현대사의 중요한 산업 유산이다.

현재의 개발 계획은 이 부지에 초대형 복합 쇼핑몰, 호텔, 아파트 등을 건설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시민단체와 역사학계는 이 개발이 광주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역사적 자원의 보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개발사는 굴뚝과 같은 일부 상징적인 구조물만 남기고 대부분의 공장 건물을 철거할 계획을 제시했다.

대규모 상업 시설이 들어서는 만큼, 개발 과정에서 공공 기여의 규모와 내용이 충분해야 한다. 공장 부지 전체의 역사적 가치를 살린 시민 문화 복합 공간이나 산업사 박물관 등의 조성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는 아직 미흡하게 반영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단기적인 경제 효과만을 쫓아 귀중한 역사적 자원을 잃는다면, 광주는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문화적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상업 시설이 들어서더라도 공장 유산의 역사적 가치와 공공성을 극대화하는 창의적인 해법을 지금이라도 도출해야 한다.

“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 향기로웠던가를 생각하시던” 의재 선생의 말씀 속에는 제자들과 미래세대를 위한 의연 중의 고언이 담겨 있다.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라도 향기로운 ‘빛의 도시’ 문화 광주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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