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피어난 '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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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어둠 속에서 피어난 '꽃의 의미'

정채경 문화체육부 차장 대우

정채경 문화체육부 차장 대우
1980년대, 민중미술의 최전선에 서 있던 이준석 작가. 그가 50대 무렵부터 꽃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다. 현실의 모순 앞에서 붓과 캔버스를 매개로 저항의식을 거침없이 드러내던 그가 어느 날부터 꽃을 그린다니. 작품세계의 흐름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민중미술의 정신과 꽃을 함께 놓고 봤을 때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꽃은 현실 직시와는 거리가 멀어보였기 때문이다.

이제와 돌이켜 그 작품들을 떠올려보니, 꽃을 그린 그 마음을 비로소 이해한다. 투쟁이라는 단어에 모두 담기 어려운 마음, 버티고 살아낸 세월을 상징화한 이미지가 바로 그 꽃이었던 것이다. 꽃은 현실을 도피한 흔적이 아니라, 긴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을 붙잡으려는 몸부림에서 한단계 나아간 결과물인 셈이다.

예술인의 상상력으로 회화로 분한 이같은 상징은 무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펼쳐진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의 제144회 정기연주회 ‘꽃’도 그 맥락과 다르지 않다. 악·가·무가 한데 어우러진 무대의 중심 축은 이건용 작곡가의 위촉곡 ‘꽃’이었다. 김춘수의 시 ‘꽃’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이름 불린 존재가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는 시의 세계처럼, 음악 역시 관객과 함께 정체성을 정립한다. 꽃을 부르는 행위로 존재를 인정하고, 인정받는 과정이 관객들로 하여금 관현악의 선율로 켜켜이 스며들게 한다.

꽃을 통해 빛을 상징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이준석 작가의 회화와 시립국악관현악단의 무대는 서로 다른 장르에서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오래 견디고 나서야 볼 수 있는, 삶의 진짜 농도에서 움트는 에너지 말이다.

민중미술의 화폭에서 꽃이 피어났듯, 국악관현악의 음상에서도 ‘꽃’은 더 이상 가벼운 장식이 아니었다. 비로소 꽃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다. 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버티고 견딘 자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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