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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의 윤동주(1917~1945. 2. 16.)는 국민 애송시 ‘서시’를 쓴 민족시인, 정병욱(1922~1982)은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국문학자다. 정병욱 교수는 ‘한국고전시가론’, ‘한국의 판소리’ 등을 집필한 고전문학 연구의 태두다.
1938년 서울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와 1940년 입학한 경남 하동 출신의 정병욱은 선후배로 만나 우정을 나눈다. 함께 하숙 생활을 하고, 서로 시와 평론을 강평해 주는 문학 동지이자 ‘소울메이트’가 됐다.
1941년 12월 졸업을 기념해 윤동주는 그동안 써온 19편의 작품을 모아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고 했다. 육필 원고를 받아 읽어본 영문학자 스승 이양하는 이 시들이 일제의 검열에 걸릴 것을 염려해 시집 발간을 미루자고 했다. 윤동주는 스승의 만류를 받아들였다. 윤동주는 나머지 한 부는 자신이 보관하고, 마지막 한 부는 ‘문학 도반’인 정병욱에게 맡겼다.
윤동주는 이후에도 더 많은 시를 썼는데, 특별히 ‘참회록’은 1942년 1월 24일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그러나 그 ‘즐거운 날’은 시인에게 다시 오지 않았다. 시인은 ‘그 한 줄’을 다시 쓰이지 못했다. 윤동주는 1942년 일본 릿쿄대학에 입학했고, 여름방학 때 마지막으로 용정의 고향에 다녀갔다. 1943년 10월에 경도 도지샤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고, 1943년 다시 여름방학을 맡아 귀향길에 오르려다 독립운동 혐의로 일경에 체포됐다.
용정 고향집에 갑작스런 전보가 온 것은 1944년 2월 18일.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는 전갈이었다. 윤동주와 같이 수감되어 있던 고종 송몽규도 같은 운명으로 함께 감옥에 있다가 며칠 후인 3월 7일 숨을 거두었다. 송몽규는 “동주는 매일 일본 경찰로부터 이름 모를 주사를 맞았다”고 증언했다. 부친 윤영석은 시신을 인수해 3월 6일 고향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었다.
윤동주의 사망 소식에 울부짖던 이는 용정의 가족들만이 아니었다. 1944년 연희전문을 졸업한 정병욱은 학도병 징집 통지를 받게 됐다. 전쟁에 나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보다 더 컸던 것은 바로 윤동주의 시고(詩稿)에 대한 걱정이었다.
정병욱의 부친 정남섭은 하동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1933년부터 광양 망덕에서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광양 망덕에 들른 정병욱은 어머니 박씨에게 윤동주 시집 원고를 맡겼다. “어머니 이 원고는 제 목숨보다 귀중한 원고예요. 저놈들에게 들키지 말고 잘 간직하세요. 제가 전사해서 돌아오지 못하거들랑, 연희전문 교수님들에게 갖다 드리면 이 원고가 세상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일경 감시망을 피해 명주 보자기로 원고를 싸서 기름종이에 넣은 후 마루 밑 땅을 파고 작은 항아리 속에 숨겼다. 다행하게도 해방이 되어 살아 돌아온 정병욱과 어머니는 시고를 꺼내 들고는 함께 통곡했다. 3권의 육필 시고 중에 이양하 교수, 윤동주 보관본은 행방이 묘연했다.
유일하게 남은 시고는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으로 발간돼 비로소 윤동주 시인이 세상에 알려졌다. 1955년 정병욱과 윤동주 시인의 조카 윤일주의 힘으로 서거 10주년 기념 시집이 발간돼 시인의 삶과 시는 완전히 부활했다. 2018년 친필 원고는 연세대학교 핀슨 홀의 윤동주 기념관에 소장됐고, 이 원고는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광양 정병욱 가옥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정병욱은 나중에 윤동주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자신에게 자필 시집을 건네던 순간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고 기록했다. 그 눈빛을 ‘민족의 슬픔을 한 몸에 짊어진 성자의 모습’으로 기억하며, 그가 남긴 원고를 ‘성유(聖遺)’처럼 받들었다.
1934년 18살 때 ‘삶과 죽음’이라는 시를 쓰기 시작한 이래 순수한 내면의 의지로 ‘부끄러움’을 닦고 또 닦으며 민족 정서의 ‘순수함’을 성찰한 시혼을 담은 우리말 시편들은 육필 원고로 우리 문학사 속에 온전히 살아남게 됐다.
1968년 정병욱의 헌신으로 연세대학교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고, 그 이후로 매년 학위 수여식이 열리고 난 후엔 캠퍼스 윤동주 시비 주변은 졸업생들의 꽃다발로 동산을 이룬다고 한다.
최근 문화잡지사 기자는 광양 정병욱 가옥의 기억에 안고 백두산 기행을 했다. 간도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용두레 우물, 일송정, 명동학교, 윤동주 생가를 들러보았다. 백두산-용정-연길-서울 연세대-전남 광양 정병욱 가옥까지 이어지는 시간 여행이었다. 척박한 황무지를 일구며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던 간도 조선족들의 강인한 생명력이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과 결합되어 한국 문학의 정점을 찍었고, 그 불멸의 문학혼이 한민족의 역사와도 이어지는 현장을 확인하는 문학 여행이었다.
‘중국 조선족 유명시인 윤동주 생가’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분단 조국 한 촌구석 잡지사 기자는 그렇게 ‘서시’ 비석과 윤동주의 조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는 부끄러움조차 잊어버린 시대에 도대체 무얼 위해 살고 있는가? 광활한 만주 벌판 위 광활한 하늘 위로 눈으로만 참회록을 쓰고 있었다.
백승현 gn@gwangnam.co.kr
백승현 gn@gwangnam.co.kr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2026.05.19 (화) 2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