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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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백홍승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백홍승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문화산책]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휘계의 거장 ‘오자와 세이지’(Ozawa Seiji)가 지난 2월 도쿄 자택에서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전 세계의 언론매체는 그의 죽음을 주요 뉴스로 다루었고 그가 음악감독을 지냈던 보스턴 심포니, 빈 필하모닉의 홈페이지와 프랑스 부장손 국제 지휘자 콩쿠르의 홈페이지에서는 동시대 전설적인 지휘자의 영면을 알리며 그를 추모하는 글을 게재하고 있다. 마치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세상을 떴을 때와 유사한 전 세계적인 추모 분위기다.

그는 미국의 명문 교향악단인 보스톤심포니를 29년간 지휘했고,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으로 8년간 일했다. 오자와가 세계 최정상의 빈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선임되었을 때 유럽 클래식계는 이 동양인의 출세에 대해 크게 술렁였다. 그보다 오래전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지휘봉을 놓았을 때였다. 몇 명의 차기 지휘자 후보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을 때 유럽의 유력 언론들은 이렇게 적었다. “오자와 세이지가 베를린 필의 지휘자가 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으로서 서양인 후보자들 가운데 이름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능력이 그들 중 최고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빈 필은 음악적으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이지만 단원 채용에 있어서는 성차별과 인종차별 문제 등으로 자주 구설수에 오르는 악단이었다. 동양인이라는 핸디캡으로 인해 우여곡절 끝에 빈 필의 정기 초빙 지휘자가 된 오자와 세이지는 2010년 식도암 발병으로 지휘봉을 놓을 때까지 2002년부터 8년간 동양인 최초로 빈 국립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직을 수행하며 크게 활약한다.

클래식 팬들이 그를 정말 특별하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지휘자로서 탁월한 면도 있지만 동양인으로서 서양 음악계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역경과 극심한 인종차별 등 기울어진 운동장을 끝내 극복해 냈다는 점이다. 그가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고 난 직후 빈 필이나 오페라를 지휘할 때 오스트리아의 귀족들(이들은 몇 대째 내려오는 극장 전용 좌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은 어느 날 갑자기 빈 국립 오페라극장에 입성한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인을 실력과는 상관없이 인정하지 않았고 공연 중 좌석에서 큰 소리를 내며 비난을 하거나 때로는 공연 관람 자체를 거부하는 일도 있었다. 그들은 동양인 지휘자에게 빈 필 지휘자 자리를 내준 것에 대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또 매우 자존심 상해했다.

오자와 세이지는 천재성을 가진 음악가였지만 철두철미하게 연습하고 연주에 대비하는 아주 성실한 지휘자였다. 그는 브람스, 말러, 슈트라우스 등 독일 작곡가들의 대규모 관현악 작품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은 한편, 베를리오즈, 드뷔시, 라벨, 메시앙 등 프랑스 작곡가의 작품도 자주 연주했다. 지휘자로서 카리스마는 정평이 나 있었고, 동양인이라고 인종차별을 하며 그를 폄하하는 사람들조차 그의 지휘 자체는 매우 훌륭하다고 말했었다.

그는 16세에 피아노 전공으로 도쿄의 도호 음악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럭비를 하던 중 손가락 골절 부상을 입어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게 되자 지휘와 작곡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1958년 도호 음악원 콩쿠르에서 지휘와 작곡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 오자와 세이지는 학업을 마치고 파리로 유학한 후 세계적 권위의 브장송 국제 지휘 콩쿠르 우승(1959)으로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오자와 세이지의 서구 무대 정식 데뷔는 1962년에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였다. 이후 본격적인 지휘자로서의 활약이 시작되어 시카고 심포니, 토론토 심포니,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등 미국의 대표적인 교향악단들을 지휘하였고 1973년 미국의 빅5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 29년간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하며 명실공히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다.

오자와 세이지는 보스턴 심포니와 함께 무려 140여장의 음반을 녹음했다. 특히 1990년대에 필립스(Philips)사와 녹음한 말러 교향곡 전집은 그 대표적인 명반으로 손꼽힌다. 혹시 오자와의 지휘를 한번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독자들을 위해 2005년 NHK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의 유튜브 영상을 소개한다. 워낙 오래전 영상이라 화질이나 음질은 떨어지지만 장담하건데 그동안 전 세계에서 연주되었던 최고의 ‘운명’ 교향곡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d44qk2IQ7cI)

오자와 세이지는 주로 보스턴에서 활동하면서도 고국에서의 활동을 병행하였는데 도호 음악원에서 지휘를 가르쳤다. 이 당시 도호 음악원 지휘과에서 길러낸 걸출한 제자들 중 한 명이 바로 몇 년 전 광주시향 상임 지휘자를 지냈던 김홍재다. 오자와 세이지는 김홍재를 특별히 총애했다. 늘 “너의 지휘에서는 대륙적인 기질이 느껴진다”며 칭찬했고 이후 두 번씩이나 보스턴 심포니의 부지휘자 자리를 추천했지만 김홍재는 당시 무국적자였던 관계로 미국행은 끝내 좌절되고 만다. 1998년 일본에서 나가노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개막식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오자와 세이지는 페럴림픽 개막식에서의 지휘봉은 김홍재에게 맡겼다.

오자와는 2005년 스위스 국제 음악 아카데미(현 세이지 오자와 스위스 국제 아카데미)를 설립해서 지금까지도 각 나라의 촉망받는 학생들이 세계 탑 클래스 연주자들에게 체계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오자와 세이지는 세계 클래식계에 한 획을 그은 거장 지휘자였으며 또한 교육자로서 아시아가 낳은 걸출한 인물이었다. 이는 인종, 국가, 이념 등 모든 것을 떠나 세상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더니 그의 이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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