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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석 전남대학교 사학과 강사 |
입춘, 24절기 시작이다. 대개는 2월 4일이다. 간혹 하루 땅겨 3일인 경우도 있다. 혹독한 추위와 언 땅에 입춘이 늠름히 서 있다. 올해 초저녁 하늘, 초승달이 반달로 가는 길목에서 호위해 줄 샛별을 거느리며 떠 있다.
2월 자연은 역동적이다. 여린 꽃들이 쌓인 눈을 비집고 나온다. 복수초꽃을 보면 노란 색깔에 중독된다. 드러누워서 찬찬히 봐야 한다.
차가운 겨울 눈발 맞으며 핀 동백꽃은 서럽디 강하다. 매화꽃이 왜 그리 귀할까.
나뭇가지를 뚫고 나와 곧바로 꽃이 핀다. 여수·변산 바닷바람 맞으며 자태를 숨기지 않은 바람꽃을 보노라면 어찌 이리 대견스러울까. 군락을 이뤄 피운 슬픈 사연의 수선화 색깔도 봄을 알린다. 다들 입춘의 신호에 따라 꽃으로 장단을 맞춘다.
‘대낄·대끼리’, 만사형통과 같은 이 말을 ‘대길(大吉)’에서 유래됐다. 강하게 부르면 이렇게 샌 소리가 된다. 새로운 출발선에서 봄의 시작을 알리는 희망 섞인 말이다. 입춘에 왜? ‘들 입(入)’자를 쓰지 않고, ‘설 입(立)’자를 썼을까. 이유는 24절기 순환을 하나의 생명으로 봤기 때문이다.
시작하려는 동작은 ‘서[立]’ 있어야 한다. 긴장해야 한다. 자연은 희망을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는 긴장과 역동성이 숨어 있다. 크(大)게 길(吉)해지기를 원한다면, 긴장해야 한다. 자연은 다이내믹(dynamic)하고, 에너자이저(energizer)다.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됐다. 자연은 Input와 Output가 철저하다. 그래서 설 입(立)자를 썼다. 새롭고 또 다른 출발선에 서 있다.
대문에 써서 붙여 놓은 ‘입춘대길(立春大吉)’은 행복을 함께 누리고 싶다는 슬로건이었다. 비슷한 말로 건양다경(建陽多慶)이 있다. 양(陽)의 기운이 시작되는 시점에 많은 경사스러운 것을 서로서로 소망했다. 굳이 ‘세울 건(建)’자를 쓰는 이유도 ‘입춘’과 같다. 입춘이 되고 나서야 꽃이 핀다.
우리 역사에서 건양(建陽)의 유래는 가냘팠다. 소박한 ‘건양(建陽)’의 기운을 조선 말 연호를 통해서라도 붙들고 싶었을까?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신분제 철폐를 부르짖고, 반외세 반봉건의 깃발을 들었다.
그해 가을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슬피 무너졌고, 이어지는 겨울은 혹독했다. 그들의 염원은 같은 해 갑오개혁에 스며들어 노비제가 폐지되는 등 신분제 질서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일제 등 열강에 의해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급기야 이듬해인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밤, 일제 낭인들은 조선 훈련대 일부 군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경복궁에서 민비를 시해해 버린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다음 해인 1896년 양력 2월 11일, 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해 버렸다. 아관파천이다. 그곳에서 1년이 넘도록 고종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바로 이 역사적인 시기에 조선은 서양력을 받아들였다.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 이후 조선은 1895년 음력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을 기해,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서양의 달력인 그레고리력으로 개력했다. 조선은 연호 건양을 양력 1896년 1월 1일부터 사용했다. 조선 개국 504년 만의 일이다. 건양 연호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칠 때인 1897년 8월 17일 이전까지 사용했다. 연호 건양을 통해 조선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었을까? 따지고 보면, 그때는 ‘건양다경’이 아니라, ‘건양다사다변’했다.
사서오경의 주역에, 건(乾)괘 상전(象傳)에 ‘천행이 건(健)하니…’와 곤(坤)괘의 글귀 중에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 나온다. 이를 빌미로 건양다경(健陽多慶)과 같이 세울 건(建)이 아니라 굳셀 건(健)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염원을 담아 쓰는 시절 문구에 건양은 입춘과 맥이 닿아 있다. 건양(建陽)이 입춘(立春)이다.
딱 이맘때 복과 장수를 염원해 붙여진 꽃, ‘복수초(福壽草)’가 핀다. 꽃말이 ‘영원한 행복’이라고 하고, 또 ‘슬픈 추억’이라고도 한다. 인생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 혹독한 겨울의 눈발과 언 땅을 뚫고 꽃을 피우면 된다. 입춘에 무등산 ‘복수초’가 피었다. 눈밭에 누워 가까이 보면 더 이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