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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 광주 북구청장 |
한 여학생이 일본 학생에게 희롱당하던 나주역 사건에서 비롯된 분노는 항일의 함성으로 번졌고, 광주에서 전국으로 확산됐다. 광주고보(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여고보(광주공립고등여자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돼 일제에 항거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식민지 치하에서 자주와 정의를 외친 청년들의 불굴의 정신이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지역적 시위가 아니라, 전국 300여 개 학교, 5만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거대한 민족항쟁이었다.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이들은 무력보다 양심으로, 침묵보다 외침으로 일제의 불의에 맞섰다. 그 용기와 희생은 훗날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그리고 촛불혁명과 빛의 혁명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주주의의 원류가 됐다. 광주는 언제나 시대의 불의에 맞서 정의를 선택한 도시였다.
그 중심에는 장석천 선생과 장재성 선생이 있다.
완도 신지도 출신의 장석천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였다. 1926년 비밀결사 ‘성진회’를 조직하고, 1929년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로 활동하며 학생들의 항일 의식을 일깨웠다. 선생은 전국 각지의 학생 시위를 조직적으로 연결해 광주의 봉기가 전국적 독립운동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1935년 광주 누문동 자택에서 순국했으며,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북구는 2023년 5월 ‘애국지사 장석천’ 현판 제막식을 열어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장재성 선생은 행동의 중심에서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독서회 중앙부’ 핵심 간부로서 항일 시위를 주도하며, 청년 항일투쟁의 실천적 구심점이 됐다. 4년의 옥고를 치르며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에서 민족의 자주와 통합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의 첫 정부는 그에게 훈장이 아닌 ‘총살’이라는 비극을 내렸다. 독립운동의 공로가 정치적 이념의 벽에 가려진 아픈 역사다.
오늘 우리가 두 분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이유는, 잊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이제라도 역사는 바로 세워지고 있다.
지난 10월, 광주에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유공자 서훈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함께해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학생독립운동 참여자들의 공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우리 북구도 장재성 선생 추모제와 위령비 건립을 통해, 뒤늦게나마 진실의 빚을 갚는 일에 함께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전남대학교 김재기 교수 연구팀은 미국 하와이 등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발굴하고, 유족의 품으로 모셔오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조국을 떠난 곳에서도 독립을 꿈꾸었던 이들의 혼이 오늘 다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이 바로 그 길 위에 살아 있다.
오는 14일 열리는 제96주년 학술심포지엄에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세계사적 가치와 문화유산적 의미를 재조명하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가능성도 논의할 예정이다.
이에 발맞춰 전남대학교를 중심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추진단’이 구성, 100주년이 되는 2029년 등재를 목표로 국내외 기록 발굴에 본격 나섰다.
이번 추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관련 기록물로는 처음 시도되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더욱 깊다.
당시 학생들의 편지와 옥중 기록, 전국 각지의 격문과 재판문서, 해외 동포 사회의 지원 자료 등 수많은 기록들이 발굴되고 있다. 미국 하와이·멕시코·쿠바는 물론, 독일·중국·러시아에도 관련 자료가 남아 있으며 일본의 학자들 또한 등재 작업에 동참하고 있다.
민족의 자주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불굴의 의지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본질이자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뿌리다.
그날의 학생들이 외쳤던 “조선의 독립 만세!”는 이제 “정의로운 대한민국 만세!”로 이어지고 있다. 그 정신이 광주의 품에서, 그리고 시민의 삶 속에서 영원히 빛나기를 소망한다.
2025.11.10 (월) 1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