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영화의 민주화를 향한 기록들-전시 ‘아시아의 장치들’
검색 입력폼
기고

[[기고] 영화의 민주화를 향한 기록들-전시 ‘아시아의 장치들’

김지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관

김지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관
영화는 특정 계층만을 위한 예술이 아닌, 기술·산업·대중문화·집단적 경험이 결합된 공공의 매체다. 또한 문학, 음악, 연극, 사진, 미술 등 다양한 예술과 접촉하면서 단일한 감상을 넘어 사회적, 집단적 경험으로까지 이행하는 종합예술 장르라 할 수 있다. 문화 검열과 사회암흑기가 합을 이루어 나가는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영화는 국가 권력과 시장 논리에 의해 급격히 왜곡되어 간다. 검열은 영화가 담아낼 수 있는 현실과 목소리를 제한했고, 흥행과 오락에 치우친 산업 구조는 창작의 다양성을 억압했다. 이는 단순한 사업의 침체가 아니라 영화가 매체적, 장르적으로 가지는 태생적인 민주성을 위축시키려는 움직임과 직결된다. 하지만 언제나 민주성은 진보를 두려워하는 제도 바깥 변방에서부터 형성되어온 것처럼 이 시기 지하다방과 밀실 같은 작은 공간에서는 새로운 영화 만들기를 시작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개최 중인 전시 ‘아시아의 장치들’은 위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제작된 아시아 각지의 작품들과, 그 정신을 잇는 현재의 작품들이 만나 하나의 공동체 마을로 구현했다. 필자가 ‘아시아의 장치들’을 기획하기 이전 구상 단계부터 주요하게 다루고자 했던 부분은 ‘한국 실험영화’ 운동의 흐름이었다. 특히 연대기적 사건을 단순 정보로서 정리하여 학습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피하고 싶었고, 이는 연대표를 특정 위치가 아닌 전시장 바닥에 표시함으로써 전시에 들어선 관객들이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 실험영화의 역사와 사건들을 밟아 나가기를 바랐다.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등장한 한국 실험영화 역시 자발적인 작은 상영회와 소규모 예술모임, 대학가와 문화 살롱 등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 유신정권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흐름은 더욱 급진화된다. 당시 한국 최초의 여성 실험영화 그룹 ‘카이두 클럽’도 만들어지는데, 이들의 짧고 굵은 활동은 남성 중심의 거대한 산업 시스템 속에서 영화를 개인과 공동체가 스스로 발화할 수 있는 하나의 예술 작업으로 활용했다. 이 시기의 실험영화는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운동에 가까웠다. 상영장은 임시적이었고 필름은 부족했으며 기록은 자주 사라졌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들은 작품에 앞서 운동으로서 기존 질서의 틈새를 통과할 수 있었다. 영화는 특정 감독이나 자본, 제도의 틀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누구나 개입하고 변형할 수 있는 열린 매체임을 증명한 것이다. 어쩌면 한국 실험영화의 작은 역사는 곧 영화의 민주성을 향한 작은 투쟁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 ‘아시아의 장치들’은 바로 위와 같은 역사적 질문과 사건에서 출발했다. 이 전시는 영화를 훌륭한 ‘작품’으로 제시하기보다, 영화와 사회를 연결하고 그 주변을 둘러싼 장치와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 여기서 장치란 카메라나 프로젝터 같은 기계만을 뜻하지 않는다. 극장과 미술관, 국가와 검열, 기록과 보존, 그리고 관객의 시선까지 포함하는 복합적인 구조를 의미한다. 영화는 언제나 이러한 장치들 속에서 생산되고 통제되어 왔으며, 동시에 그것을 교란하고 다시 점유하려는 시도 속에서 변화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본질적으로 실험영화라는 장르는 기존의 영화 관습에 질문을 던진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실험영화들은 전통적인 극장 시스템을 고수하기보다는 미술관, 야외 공간 등 다양한 장소에서 관객과 만나며 융합적인 특성들을 드러낸다. ‘아시아의 장치들’이 거대한 공간 속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동시에 펼쳐 보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실험영화가 지닌 유연성에 있다. 관객은 자신만의 리듬으로 걷고, 멈추고, 다시 돌아오며 영화를 유동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전시장 내 구조물의 꼭대기에 이르면, 마치 전망대에서 하나의 풍경을 바라보듯 장민승의 연출과 정재일의 음악으로 완성된 ‘둥글고 둥글게’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한국의 모습과 5·18민주화운동의 이미지들을 담아낸 이 작품은 전시의 마지막 장면으로서, 문화전당이 자리한 장소의 역사와 잊힐 뻔한 이미지, 그리고 목소리들을 다시 호출한다.

문화전당은 2015년 개관 전후 광주 정신-민주주의-예술로 상통하는 아시아의 예술자료들을 연구하고 수집하면서 실험영화 아카이브를 시작했다. ‘아시아의 장치들‘은 10년 동안 축적한 실험영화의 과정들을 보여주는 전시로서, 지워진 기억과 주변의 목소리들을 다시 공론장 안으로 불러들이며, 서로 다른 시대와 감각의 외침이 겹치는 민주적 장치이자 살아있는 또 하나의 아카이브로서 관객에게 다가간다.
김지하 gn@gwangnam.co.kr         김지하 gn@gwangnam.co.kr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광남일보 (www.gwangnam.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