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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호 목포과학대학교 관광문화융합과 교수 |
148일의 표류, 세계를 놀라게 한 ‘표해록’의 탄생 1488년 1월의 어느날, 제주도에서 추쇄경차관(노비를 잡는 특명관직)으로 임무를 수행 중이던 최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게 된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어버이의 상(喪)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는 즉시 고향(전남 나주)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러나 하늘의 장난이었을까. 거센 풍랑을 만난 배는 표류하기 시작했고, 거친 바다와 사투를 벌인 끝에 중국 절강성에 도착하게 된다. 제주를 출발한 지 14일 만의 일이었다.
중국 땅에 발을 디딘 최부는 자신을 왜적이 아니라 ‘조선에서 온 선비’라 당당히 소개했고, 처음에는 맏지 않았지만 대화를 이어 갈수록 그의 학식과 태도에 감명받은 명나라 조정과 관원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후 그는 운하를 따라 이동하며 148일간의 긴 여정 끝에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생생한 기록을 담아낸 책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이다. ‘표해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히며,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목숨을 건 절체절명의 위기, 빛을 발한 조선의 리더십 최부의 여정이 위대한 진짜 이유는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다는 점에 있다. 거친 풍파와 파도 앞에서 신분도, 권위도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또한 서로를 헐뜯고 비하하고 탓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부는 뚜렷한 역사의식과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충(忠)과 효(孝)라는 유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중심을 잡았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흔들리지 않는 대범함은 함께 표류하던 일행들에게 거대한 이정표가 되어줬다. 목숨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빛난 그의 리더십 덕분에, 함께 배에 올랐던 일행 43명 전원이 무사히 귀국하는 극적인 인간 승리의 기적을 이뤄낼 수 있었다.
그 위대한 여정의 시작점이 바로 그가 태어난 ‘동강면 인조리 성지마을’이다.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도 비겁하지 않았던 간관(諫官)최부 선생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이다. 사후 ‘연산군일기’(1504년 10월 25일 자 졸기)는 그를 향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남겼다. “최부는 성품이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했다. 역사와 유학 경전에 모두 능통해 문장력이 매우 풍부했고, 임금에게 간언하는 신하(간관)가 돼서는 자신이 아는 바를 눈치 보느라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보복이 두려워 책임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왕에게 직언을 고하는 사간원 사간(정3품 직책) 등의 요직을 지내며, 권력 앞이나 두려움 앞에서도 비겁하게 피해 다니지 않고 올바른 도리만을 숨김없이 고했던 참된 공직자였다. 비록 1504년 연산군 때 갑자사화라는 피바람에 휘말려 억울하게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의 올곧은 기개만큼은 역사에 선명히 각인됐다. 오늘날 우리는 위기 앞에서 너무나 쉽게 타협하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신념을 저버리는 시대를 살고 있을지 모른다. 500여 년 전, 거친 대양의 풍랑 속에서도 조선 선비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43명의 목숨을 구했던 최부, 그리고 서슬 퍼런 군주의 칼날 앞에서도 직언을 멈추지 않았던 최부. 그가 남긴 ‘표해록’의 한 페이지를 넘기며, 우리가 마주한 삶의 풍랑을 헤쳐 나갈 진정한 리더십과 올곧은 기개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임병호 gn@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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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30 (화) 2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