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차선보다는 ‘불가능한 최선’ 택하는 작가 되고 싶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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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예술인

"가능한 차선보다는 ‘불가능한 최선’ 택하는 작가 되고 싶죠"

[남도예술인] 사진·설치 문선희 작가
하고 싶은 일 하기 위해 서른에 교직 나와 예술가 도전 꿈 이뤄
고라니·구제역 매립지 탐구…옛 국군광주병원서 작품 '호응'
"안보이는 존재 보이고, 안들리던 부분 들리게 할 것" 밝혀

2015년 전시를 열었다고 했는데 그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이름을 복기한 것은 지난 3월31일 ‘제13회 광주비엔날레’(4.1~5.9) 프레스오픈 때였다. 주전시동을 모두 둘러본 뒤 옛 국군광주병원에서 진행중인 5·18민중항쟁 40주년 기념 글로벌 프로젝트로 마련된 특별전을 통해서다. 거기에 그가 작품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목소리’를 출품했기 때문이다. 그날 현장에서 만난 그로부터 작품 설명을 듣게 됐다.

그의 작품은 독특했다. 설치인데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옥스아이 데이지 꽃 5000포기를 바닥에 깔아 가운데 곡선으로 구불 구불한 통로를 만들어놓았고, 5·18민중항쟁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사람들을 찾아내 인터뷰를 땄다. 인원은 80명으로 그들이 들려준 5·18을 채록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중년이 됐기에 현실에는 잘 맞지 않아 요즘 아이들 20명의 목소리에 담아 사운드로 실현한 작품이다. 그곳에서 식물로 작품을 구현한 경우였다. 더욱이 흰 꽃들이 피어있어 생명의 소중함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가 해석하는 5·18민중항쟁은 사적지 중심이 아니라 소소한 골목도, 집들도 소중하다. 모두 항쟁의 자취가 서린 곳들로 여긴다. 이 전시는 그가 5·18민중항쟁과 관련한 작품을 꼭 하겠다고 자신과 했던 약속을 현실화한 자리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교사에서 예술가로 변신한 문선희씨다. 문 작가를 최근 하정웅미술관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마침 미술관 1층 카페가 폐쇄돼 상록도서관으로 옮겨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문 작가의 예술 입문은 쉽지 않아 보였다. 문화예술 관련 학과로 진학하지 않고 대학 사범대학에 진학해 가정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광주 서진여고 교사로 부임해 6년여 재직하다 예술을 위해 퇴직을 선택한다. 원래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 싶어했으나 창작인으로의 삶이 어렵다는 부모의 말에 따라 학창시절에 좋아만 했지, 본격적으로 뛰어들지는 못했다. 문학소녀로 지냈다는 의미다. 서른 즈음 부모의 말씀을 따라 삼십까지 살았으니까 이제부터 자신의 삶을 살 각오로 교직을 정리하고 나왔다. 나중에 후회없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또 교육을 계속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그의 예술 입문을 재촉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처음에 사진매체를 택했다. 사진을 하며 글을 쓴 것이다. 카메라는 이미 교직에 있을 때 마련해 뒀다는 설명이다. 물론 서른에 갑자기 예술을 맞아들인 것만은 아니다. 스무살 이후 전시를 보러 많이 다녔다. 덕분에 시각예술의 힘을 알게 됐다는 전언이다.
문선희 作 ‘피가, 모자랍니다’
“언어로 도달할 수 없는 것에 시각적으로 도달할 수 있겠구나 느꼈죠. 그리고 미술이나 문학 등 예술이 너무 좋았습니다. 언어로 좋아할 수 있는 예술을 선호했던 셈이죠. 그러다 사진으로도 제가 표현이 가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에게 사진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 매개로 읽혔다. 사진 입문의 의미는 처음으로 언어가 아닌, 다른 표현 도구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간 듯하다. 글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사진과 병행하면 충분히 예술가로 가능하겠다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이전에는 텍스트로만 표현했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부모가 바라던 삶을 그동안 살아왔으니 서른 이후는 자신만의 시간을 스스로 활용해보자는 결심을 굳혔다. 여기다 자신이 자신 하나 책임질 수 있겠다 싶어 무모할 수 있지만 도전을 선택했다. 뭘 안해도 되는 시간이 주어지니까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보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그때 든 느낌을 빠뜨리지 않고 들려줬다.

“예전에는 문화 향유자이니까 편했는데 지금은 그 예술가들이 동료로 보였어요. 그들이 너무 뛰어나게 다가왔구요. 시각적으로 더 뛰어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위축이 됐습니다. 그러다보니 3년 동안 정말 아무 것도 못하겠더군요. 그러다 작가가 돼 보니까 절대 사유가 부담돼 그 어떤 것을 선택하지 못하겠더라구요. 주변에 너무 훌륭한 작가들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게 됐죠.”

예술이라는 게 현대적 흐름이 있는데 그 결이 자신에게 맞지 않았고, 그것은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아예 그런 흐름을 맞추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 길이 외롭고 힘든 길이더라도 내면의 길을 따라 가야겠다고 다졌다. 이는 자신이 소수를 대변하거나 소수가 좋아하는 표현을 구사하는 작가가 되더라도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깨쳤다. 이를 위해 3년이 소요됐다. 이 3년 동안 그는 많은 것을 깨친 듯 보였다. 개인사를 표현하는 작가 보다는 사회적 약자나 약한 생명개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로 방향을 정립했다. 그리고 작가가 되면 자신이 주제를 선택하는 것으로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세 가지 시리즈를 발표했는데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자신을 놔줄 때까지 사유하고서 작업을 한다는 귀띔이다.



예술가로서 자세와 정신, 방향성을 모두 갖춰가던 그에게 2014년부터 2015년까지 구제역 매몰지 촬영은 또 다른 계기를 안겨준다. 2010년 겨울에 구제역이 대대적으로 발생했고, 엄청 많이 살처분했다. 그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문명사회에 살았지만 너무 야만적이어서다. 이런 저런 사유들을 지속하고 있던 2014년 봄 구제역 매몰지가 3년 지나면 원래 대로 집도 짓고, 농사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거기다 농사를 지어도, 집을 지어도 될까와 이것이 생명에 대한 예의일까 고민에 빠져 들었다. 이것이 잊혀지지 않자 집에서 가까운 곳을 찾아 확인에 나서야 했다. 그곳에서 그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비닐 하우스인데 오리 냄새가 났다. 안에 들어가 보니까 물컹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물러났다. 그래서 아예 다른 매립지를 찾아갔더니 물컹한 땅에 밀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하얀 것이 밀가루가 아니라 곰팡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모래를 뿌려놓았다는 것을 목도했다. 제보를 생각했는데 한군데로는 안될 것 같아 매립지 479곳 중 100곳을 무작위로 뽑아 찾아다녔다. 앞서 확인한 내용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것 모두를 그는 카메라 앵글에 담아냈다. 2015년 금호갤러리 청년작가지원에 선정되면서 첫 개인전을 열고 본격 시각예술가로 데뷔했다. 갤러리 1∼3관 모두를 활용해 100곳의 결과보고전을 진행해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예술가니까 끝까지 걱정하고 울어주는 사람이 돼 사죄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응시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 응시의 방식은 정면으로만 피사체를 잡는 것이다. 당시 전시가 서로 마음의 불을 밝혀주는 기회가 됐다고 술회한다.



특히 그의 작업에서 변함없이 동일하게 관통해온 메시지는 ‘묻다’라는 서술어다. 이를테면 살처분과 관련해 병에 걸렸다는 확신이 없는 데 살아있는 생명까지 묻다, 살처분된 생명을 묻다, 그렇게 일 처리를 한 책임자들에 묻다라는 중의적 의미로 귀결시켰다. 옛 국군광주병원에 출품했던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역시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어 매몰지보다 먼저 작업한 주제가 고라니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작업 속도가 느린 이유로 고라니를 촬영한 지 8년이 됐다는 것으로 대신했다. 올해 고라니 관련 사진 작품전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에게 ‘어떤 작가가 되고 싶냐’에 대해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작가적 입장에서는 가능한 차선보다는 불가능한 최선을 택하는 작가가 되고 싶구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던 존재가 보이고, 들리지 않던 부분을 들리게 만드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고선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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