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권익위원 칼럼]문화의 뿌리, 전통문화의 맥을 잇다
검색 입력폼
독자권익위원 칼럼

[독자권익위원 칼럼]문화의 뿌리, 전통문화의 맥을 잇다

조상열 대동문화재단 대표이사

그때 나이 38세. 1995년, 대동문화재단을 세워 첫출발할 때 나는 혈기가 왕성한 청년이었다.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에 기여한다’는 설립 취지에 따라 전통문화지킴이를 자임하면서 초지일관 매진해 왔다.

오늘날 대동문화재단은 호남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지킴이 단체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30여 년간 발간해 온 격월간 ‘대동문화’는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 잡지이다. 장인(匠人)에게 수여하는 ‘대동전통문화대상’은 시민 후원의 문화 나눔으로 실시된다는 점에서 매우 값진 일로 평가를 받는 상이다. 대동문화재단이 전통문화지킴이로 한 우물을 파며 문화의 소중한 가치를 공유하고 지켜가는 것도 또 하나의 전통을 이어가는 길이라고 여긴다.

설립 후 30년 동안 책임자로서 나름의 보람과 자긍심도 있지만, 초심을 견지하며 자생해야 하는 CEO로서의 부담감 또한 결코 적지않다.

30성상(星霜),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나는 어떻게 하다 오늘날 전통문화지킴이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설립 무렵 지금처럼 가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하지 않았다. 나는 늘 인덕이 많은, 복 받은 사람이다. 성장 과정마다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과 도움이 많았던 덕분으로 오늘이 있는 것이다.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하며 몇몇 분을 지면에 모셔 본다.

첫 번째, 서양화가이자 민족주의자인 오지호 선생과의 인연이다. 나는 70년대 중반 광주 호남동성당 별관에 자리한 호남한문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명예원장님이셨던 선생님을 처음 뵈었고, 2년여 동안을 곁에서 모시는 영광을 누렸다. 호남한문학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교부 인가학원으로 당시 지역 명사들의 문화살롱 역할을 했던 곳이다. 선생님을 비롯 의재 허백련, 근원 구철우, 송곡 안규동, 김정용 신부, 김창선 옹 등이 수시로 출입을 했다. 어린 나이에 당대의 문화예술, 지역사회의 거물들을 뵙는 영광은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선생님은 틈만 나면 나에게 ‘민족을 생각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 십대 후반의 춥고 배고픈 나에게는 민족이 무엇인지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지만 이제 그 말씀의 뜻을 알만하다.

다음은 광주의 오월이다. 계절의 여왕이라 찬미 되는 오월은 어느 곳이나 한 폭의 수채화이다. 특히 짙푸른 신록에 만화방창(萬化方暢)하고, 붉은 황토는 남도의 색깔로 대변되면서 뭇사람들을 흥분하게 한다. 어떤 문인은 “남도의 봄빛을 보지 않은 자는 남도의 색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오월이라 할지라도 남도 사람들에게 오월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오월이라는 단어는 자연적으로 보면 ‘계절의 여왕’이라 찬미 되는 가장 아름다운 봄철이다. 반면 한국 현대사에서 오월은 엄숙하고 짠한 단어이기도 하다. 남도에서만큼은 단순한 봄을 넘어서 남도인들의 심장을 강하게 뛰게 하는 그런 오월인 것이다.

1980년 5월. 22살의 피 끓는 청년 시절에 내가 보았던 남도의 봄은 옛이야기 지즐대며 실개천 졸졸 흐르는 자연의 봄이 아니었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남도의 봄날은 신군부 군홧발에 짓밟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비극의 현장에서 민주시민들과 함께 몸부림치던 20대 청년이었던 나는 계엄군의 만행을 똑똑히 보았다. 금남로에서 함께 싸우던 십대 후반 동지의 처참한 죽음을 본 순간, 나는 분노와 두려움이 교차됐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두려움이 분노를 눌렀고 나를 70리 밖 나주 금천의 고향 마을로 도망치게 했다. 두려움과 비겁함 때문에 살아남았던 나는 그날 이후 부끄러움으로 괴로워했다. 80년 이후 살벌한 90년대 초반까지는 ‘5월 광주’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살았다. 마침내 용기를 내서 망월동 열사들의 묘역을 찾아가서 동지들 앞에서 눈물로 다짐했다. “동지들이여! 5월 그날, 금남로 유동삼거리에서 슬그머니 달아났던 비겁한 사람이외다. 이제 나라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면서 살아남은 목숨값을 하다가 뒤를 따르겠소이다. 평안히 잠드소서!”

그 이후 15년이 지난 1995년 5월 16일. 오늘날 내 필생의 업이 되어있는 사단법인 대동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선현들이 남긴 유구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전통문화 발전을 위해 살면서 이 땅에 선한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 오지호 선생께서 주신 정신적 토양에 5월 광주에 대한 채무의식 같은 것들이 밑바탕이 됐다고 생각한다. 또한 1990년 초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바로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 답사 신드롬의 영향을 받았고, 이것이 오늘날 문화유산지킴이로 살아가는 도화선이 됐다.

대동문화재단의 ‘大東’은 우리나라의 애칭으로 ‘대동여지도’에서 따왔다. 광주에서 시작했지만, 결코 전라도에 머물지 않고,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바르게 공부하고, 지켜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전통문화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고단하고 힘겹다. 능력은 부족하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열정과 우직함 하나로 일로매진하고 있다. 문화 나눔으로 후원해 주신 모든 후원자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올리며, 대동문화재단은 또 다른 30년을 위해 전진하며, 착한 단체가 되고자 다짐을 해 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광남일보 (www.gwangnam.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키워드 :
- [부고] 박수연(AP신문 기자)씨 외조부상
- 진도 해상 차량 추락·일가족 사망…40대 아버지 긴급체포
- 일가족 4명 탄 승용차, 전남 진도항 바다로 추락
- 광주시, 인공지능 실증·사업화 협력 본격화
- [대선 D-1] 신임 대통령 취임식, 4일 국회서 열릴 듯
- [21대 대선 대신협 공동기획Ⅱ] 정당 대선 후보 지역 공약은?
- [기고] 전남 재생에너지 선도…‘비싼 전기’는 없다
- ‘부상병동’ KIA, 잇몸으로 분위기 반전한다
- 홍명보호, 11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 확정 위해 이라크로 출국
- 전국 아마추어 골퍼들, 골드레이크CC서 우정의 샷 대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