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지간’ 나희덕-조온윤 시인, 시집 동시 출간
검색 입력폼
문학/출판

‘사제지간’ 나희덕-조온윤 시인, 시집 동시 출간

조선대 문창과서 사제 인연…‘물질·꿈’의 내면 관망
문학동네서 같은 달 시인선 229·231번째로 출간
산 물질로서 사람…꿈 같은 꿈 바깥의 시간 응시

조온윤 시인
나희덕 시집 표지
나희덕 시집 양면
··나희덕 시인, 열번째 시집 ‘시와 물질’

‘사람에게 주어지는 근원적 생명’ 탐색



··조온윤 시인, 2시집 ‘자꾸만 꿈만 꾸자’

‘내밀한 영역으로서 꿈’ 깊이있게 천착



【문화기획】스승과 제자가 나란히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달에 시집을 펴냈다. 개별로 출간한 시집이지만 문학동네 시인선으로 지난 4월 같은달에 인쇄에 들어갔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이것 말고도 조선대 문예창작과 사제로 인연을 맺었다. 한 사람은 그를 가르치는 교수로, 또 다른 한 사람은 그에게서 시를 배우는 학생으로 만난 것. 주인공은 충남 논산 출생 나희덕 시인과 광주 출생 조온윤 시인(공통점 동인). 나 시인은 제10시집 ‘시와 물질’을 시인선 229번째권으로, 조 시인은 제2시집 ‘자꾸만 꿈만 꾸자’를 시인선 231번째권으로 각각 출간했다. 두 사람 모두 광주에서 거주했으나 현재는 모두 떠나 지낸다. 나 시인은 2001년부터 2018년까지 조선대 교수로 재직한 뒤 2019년부터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조 시인은 광주에서 그동안 활발하게 활동을 펼쳤지만 현재는 직장 때문에 경기도 화성에서 지내고 있다. 스승과 제자의 시집 모두 각각 51편의 작품이 수록됐다.

두 사람 사이 외연으로 드러나 보이는 시집 속 공통점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시적 단서들은 포착된다. 빛에 대한 시적 사유의 표출방식을 살펴본다. 나 시인의 ‘오늘의 햇볕’과 조 시인의 ‘모조햇빛’은 완연하게 다른 빛의 사유를 읽어낼 수 있다.

먼저 스승은 시 ‘오늘의 햇볕’을 통해 ‘어떤 증오와 조롱의 말을 들었다//독기 서린 말의 과녁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잠시의 기쁨을 꺼버리기에는 충분했지/축하의 말조차 감정의 이물질이 섞여 있다는 것을/그들의 표정만으로 알 수 없었다//어쩌다 햇볕이 좀더 드는 자리에 앉게 되면/치러야 할 몫이 있는 법//자신은 왜 그늘에만 있어야 하느냐고 묻는 이에게/빛에 대한 변명을 해서는 안 되지//…중략…//오후 내내 걸었더니 체기가 조금 내려간 것 같다//부디, 오늘의 햇볕에 대해/입을 다물자//입속에서 침과 모래가 섞여 울컥거린다 해도’라고 노래한다.

조 시인은 시 ‘모조햇빛’을 통해 ‘창 없는 방의 나날이었다/남향의 바람과 햇빛은 값비싸서/초년의 급료로는 살 수 없었다//일과 후의 해는 너무 짧았다/빛을 오래 보기 위해서는/찰칵거리는 기계가 필요했다//물위에는 물비늘이 가득했다/누군가 그 비싼 빛을 무한 복제해/펑펑 흩뿌려놓은 것만 같았다//기계의 저장 공간에 빛을 주워 담았다/빛을 붙잡아두려는 시도는/때로 시간을 붙박기도 했다//나에게는 두 가지가 다르지 않았다/모사된 조도와 명암에 따라/시절이, 눈부심이, 슬픔이, 그 모든 감각이 살았다//…중략…//햇빛 없는 방에서/햇빛이 인쇄된 포스터로부터/온기를 쬐던 나날이었다’고 읊는다.

‘오늘의 햇볕’은 시작 화자가 여름이 아닌, 나머지 계절에 자연이 주는 빛을 가지고 어떤 이는 빛을 갖고, 또 어떤 이는 그늘로 밀려나는 세태의 질서를 투영하고 있다. 가진 자의 말은 변명이어서는 안되고 함부로 말로 뱉어내서는 안되는 금기같은 것이 있다. 이에 반해 ‘모조햇빛’은 햇빛마저 자유롭게 누릴 수 없는 정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적 화자는 도저히 자본으로 거래되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거래되는 작금의 현실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질타한다. 빛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만으로 부족해 제품처럼 공장에서 제조돼 시장에 나오는 빛을 상상하게 만든다.



조온윤 시집
조온윤 시집 양면
조온윤 시집의 굿즈의 하나
두 시집 표지
또 두 시인 간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익명의 수많은 사람들의 안식처에 대한 서로 다른 시적 결이 읽힌다. 한 사람은 ‘방’을 봤고, 또 한 사람은 ‘집’을 바라봤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방값이든, 집값이든 허상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이들 시에 대한 전개가 이뤄지는 듯하다. 나 시인이 인식하는 방은 허공에 있고, 조 시인이 사유한 집에는 유령이 드나든다. 나 시인의 ‘허공의 방’과 조 시인의 ‘유령의 집’은 아예 안온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나 시인은 시 ‘허공의 방’을 통해 ‘…전략…//그러나 손과 손이 끝내 닿을 수 없는 곳에/우리는 있다//…중략…//누군가에겐/이 방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누군가 튕겨나갔다 돌아온 줄도 모르고//…중략…//예약된 시간만큼은/줌인과 줌아웃의 자유가 허락된 이 방에서//녹음과 녹화가 가능한 이 방에서//배경화면을 바꾸고 이름을 바꾸고 설정을 바꾸고/캄캄한 바둑알이 되어’라고, 조 시인은 시 ‘유령의 집’을 통해 ‘그가 오는 이유는 하나야/걸어 잠글 수 없는 세상을 도둑맞지 않도록/누군가는 밤새 맨정신으로 지켜야 하거든/꿈에서 떠난 이들을 만나는 너의 보석 같은 동공에/먼지가 앉지 않도록 덮어주어야 하거든’이라고 각각 형상화한다.

‘집’과 ‘방’은 현실사회에서 가장 극명의 물질의 표상으로 부각되고 있는 중이다. 나 시인이 노래하는 방은 오프라인에 존재하는 방이 아닌, 온라인상 존재하는 방으로 줌인과 줌아웃이 가능하며 수많은 바둑알과 같은 대상이다. 똑같은 모양으로 생긴데다 획일적으로 검고 흰 외형으로 가득찬 공간의 반어로 읽힌다. 또 조 시인이 노래하는 집은 ‘걸어 잠글 수 없는 세상을 도둑맞지 않’음에 시적 전율이 느껴진다. 걸어 잠그고자 해도 다 들통날 수 밖에 없는, 최첨단 현시대의 정교함을 드러내면서도 세상을 통째로 도둑맞을 수 있다는 설정이야말로 서로 눈을 가리고 속이는 세태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와함께 그림 연작처럼 인류학자인 애나 로웬하웁트 칭의 대표작을 차용한 ‘세계 끝의 버섯’이나 ‘숲에서 버섯을 캐고 있는 가난한 손들에 대해/값비싼 송이버섯을 따라 움직이는 자본의 흐름’으로 여러 생각거리를 안겨주고 있는 ‘산호와 버섯’은 나 시인의 시와 물질에 수록된 작품들로 제목의 유사성에 때문에 두 편을 곰곰히 읽게 됐으며, 조 시인의 ‘역사 상설전시’나 ‘도슨트’ 같은 작품 역시 소재적으로 동일한 상상을 하게 하는 시 제목들로 이해됐다.

나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사람은 걷고 말하고 생각하는 무기질인 동시에 멈추고 듣고 느끼는 유기체. 살아숨쉬는 물질로서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묻고 있고, 조 시인은 “좋은 꿈을 꿨다. 다른 것과 맞바꿀 수 있다. 이 책을 매몽 문서를 삼고 꿈 같은 꿈 바깥에서 함께 있는 시간들로 받겠다”고 각각 적고 있다.

나희덕 시인
<>나 시인의 시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근원적 생명’(박동억 해설)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조 시인의 시는 ‘내밀한 영역으로서 꿈’(양경언 해설)에 대한 천착과 탐색으로 점철된다. 닮은 구석을 쉽게 찾기 어려워 더욱 집중해서 읽어야 했기에 이 두 시집에서 시 속에 투영돼 있는 물질과 꿈의 시적 담론에 대한 격차를 좁혀가는 과정이 녹록치 않았지만 한층 더 단단하게 살과 뼈를 이루고 있는 시를 읽는 시간이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고선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광남일보 (www.gwangnam.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