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리뷰] 비움과 채움, 코러스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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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리뷰] 비움과 채움, 코러스의 상상력

-순천시립극단의 ‘페드르’ 공연을 중심으로
연극평론가 김길수(순천대 명예교수)
감추기·속이기 연속…질펀한 익살 언어 버무려
거리두기·침잠·관조적 자세…깨달음·성찰 쾌감

김길수 순천대 명예교수
‘페드르’ 일부
‘페드르’ 일부
‘페드르’ 일부
순천시립극단의 연극 ‘페드르’(라신느 원작, 김지용 재구성 연출, 6월 19∼20일, 순천문화예술회관)는 감추기와 속이기의 연속이다. 속이기가 먹혀 들어가면서, 배반 정서가 가세한다. 무너짐은 무한 광대한 분노 에너지로 폭발한다. 정교함으로 아름다움으로 장식된 웰메이드 무대 세팅은 무시되고 외면된다. 원형 무대, 비움, 그런데 무언가가 채워져 있다. 채움의 마법 세계에 홀린 자들, 선율은 이들을 아우라의 비밀 세계로 한층 두층 끌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금지된 사랑, 고백해서는 안 될 전처 아들(문창주 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자(최보희 분), 억누르고 억눌러 왔던 것, 용암처럼 터져 나온다. 이성으로, 왕비의 체통으로 이를 억눌러 왔다. 꿈으로, 환영으로 늘 보이는 자, 그를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내쳐왔다. 그러나 준엄한 왕가 율법에 짓눌려 질식 직전이다. 이를 고백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프랑스 극작가 라신느의 스토리텔링, 인간 본성의 원초성과 이를 짓누르는 왕가의 율법의 줄다리기, 유장한 제의 언어, 시적 언어는 이 시대 말초 감각 코드, 질펀한 익살 언어와 버무려진다. 왕이 죽었다. 왕이 돌아왔다. 이 두 이슈로 사람들의 마음은 극에서 극으로 오간다. 금지된 사랑, 전처 아들을 향한 사랑 고백, 미쳤다. 정상이 아니다. 괴롭다. 왕을, 남편을 배반한 여인, 발각될까 두렵다. 연극은 정보 차이로 승부를 건다. 왜 저럴까. 왜 불안해할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의 비밀, 감추려는 자와 파헤치려는 자, 그 밀당이 숨 막히게 전개된다.

선율은 대사에 숨겨진 것들, 일상 언어로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한계 너머의 우주를, 내 잠재의식에 깊숙이 숨겨진 신비한 영역을 건드려낸다. 무언가에 짓눌린 자, 말라간다. 그 실체를 알려고 다가선다. 도망간다. 감추려는 여정, 밝히려는 여정, 원형 빈 무대와 가장자리 경사로에서 펼쳐진다. 발각 심리, 불안 심리에 의문과 의심의 우주가 상호 교차하고 겹쳐진다.

선율은 그 미묘한 떨림과 진동을 연주한다. 공명의 온도가 높아질수록 빈 무대는 채워지고 출렁거린다. 그로테스크 선율, 공감이 충족되는가. 아, 왕이기에, 권력자이기에 다가가기 힘든 영역, 이게 왕의 존재론적 숙명인가. 거리두기, 침잠, 관조자적 자세 촉구, 선율의 건드림으로 깨달음과 성찰 쾌감이 밀려든다.

원형 무대, 비워있지만 비워있지 않다. 원형 무대를 둘러싼 가장자리 구조물, 이곳에서 펼치는 행동은 안정과 불안으로 대비된다. 쫓기는 자의 불안 초조, 위태위태한 사랑 여정이 펼쳐진다. 자유로움이 제한된 구조물, 공연은 불안정, 부조화의 동선으로 승부를 건다. 차분함과 평화를 잃은 자, 불안 초조의 움직임 선이 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디테일하게 일깨워 낸다. 사물과 소품, 구조물이 예술 사물이 되어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만드는 작업, 내가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빈 무대, 투박한 무대, 빈 공간에서 웰메이드 상상 무대의 유장함과 걸출함을 극명하게 일깨워낸다.

거짓 정보로 눈이 가려진 자, 불꽃 튀는 테세우스의 분노와 질타,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들, 공연은 먼 곳과 가까이, 공명과 울림, 그 반응의 차이로 승부를 건다. 왕의 포효, 소름은 공포로 이어진다. 아비로서 능멸 당했다는 자괴감이 부상한다. 자기 연민과 자기 비탄 정서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왕, 본질을 보아야 할 자, 진리를 누려야 할 자리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살아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공연장 문을 열고 나오는 자, 깨달음과 거듭남의 산책 여정을 향해 새롭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김길수 gn@gwangnam.co.kr         김길수 gn@gwangnam.co.kr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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