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남농 허건이 전하는 예술적 성취와 경제적 안정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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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남농 허건이 전하는 예술적 성취와 경제적 안정의 조건

김지훈 전남대 미술학과 외래교수(미술학 박사)

김지훈 전남대 미술학과 외래교수
화가이면서 교육과 연구, 전시 기획을 병행해 온 나에게 예술적 성취와 경제적 안정의 관계는 오래된 질문이었다. 예술가는 가난해야 순수한가. 작품의 가치와 안정된 생활은 함께 이룰 수 없는가. 한 영재교육원에서 초등학생들과 미술 활동을 함께하던 어느 날, “나중에 화가가 되고 싶니?”라고 물었다. 상당수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까닭은 뜻밖에 비슷했다.

“가난하니까요.”

화가와 가난을 연결하는 관념이 어린아이들에게까지 퍼져 있음을 실감했다. 미술영재교육의 목적은 예술가 양성만이 아니지만, 아이들이 경제적 이유로 화가를 진로에서 미리 지운다는 사실은 씁쓸했다. 예술적 성취와 경제적 안정은 정말 양립할 수 없는가. 남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이 두 가지를 모두 이룬 화가는 없을까. 이 질문의 끝에서 만난 인물이 남농 허건(1908~1987)이다.

남농에게는 ‘소치 허련의 손자’, ‘운림산방 3대 화가’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이러한 가문의 명성이 그의 경제적 안정까지 보장해 준 것은 아니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궁핍 속에서 한쪽 다리를 잃는 고통도 겪었다. 그에게 그림은 예술적 이상인 동시에 가족의 삶을 책임지는 절박한 노동이었다. 그렇다면 남농은 어떻게 빈곤을 딛고 화업을 일굴 수 있었을까. 나는 남농의 가족과 제자, 그와 가까이 지낸 지인의 기억을 듣고 기록을 살폈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갈수록 남농의 성취가 그림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생계의 현실과 화단의 인정, 작품의 수요와 거래, 제자 교육, 사람들과의 관계, 지역사회가 그의 화업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남농화실’이 있었다. 이곳은 작품을 창작하고 제자를 교육하는 곳이자 작품이 거래되는 공간이었다. 화랑 관계자와 애호가, 문학인과 예술가는 물론 교육계·언론계·지역사회 인사들이 드나드는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한편 남농의 화업 형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아내 홍막여였다. 그는 가계를 꾸리고 화실의 공간을 마련했으며, 제자와 방문객의 식사와 돌봄을 맡고 생활 질서와 인간 교육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처럼 홍막여는 창작과 교육, 생활과 교류가 결합한 남농화실의 성립과 지속을 가능하게 한 공동 주체였다.

남농은 화실을 찾는 사람들을 환대하며 관계를 넓혔다. 그곳에서 형성된 관계망은 작품이 지역을 넘어 유통되고 폭넓은 애호가층과 만나는 기반이 되었다. 1960년대 이후 작품 판매가 본격화되면서 경제적 안정도 뒤따랐다. 한 연구참여자는 인터뷰에서 남농을 “화가 재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가난했던 화가가 작품을 통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넓혀 갔다는 인상을 압축한 말이다.

남농은 그 성취를 개인의 명성과 축적에만 머물게 하지 않았다. 후배 예술가를 지원하고 장학금을 기탁했으며, 작품과 수석을 기증했다. 운림산방을 복원하여 기부채납하고 남농기념관을 건립하여 지역의 문화적 기반도 넓혔다. 지역사회가 그의 화업을 지탱했다면, 남농은 문화적 토대를 넓히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의 삶은 예술적 가치와 경제적 성취가 반드시 대립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정당한 평가와 거래로 생활이 안정될 때 창작도 지속될 수 있다. 예술가에게 가난을 견디라고 요구하면서 좋은 작품을 기대하는 것은 가혹하다.

예술가는 자신을 둘러싼 조건을 읽고 사회와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정책과 제도는 창작 공간과 발표 기회를 넘어 예술가가 안정적으로 창작할 경로를 마련해야 한다. 지역사회도 예술가를 일시적인 지원 대상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함께 만드는 동반자로 바라보아야 한다. 예술가의 성취는 개인의 재능과 희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창작이 가능한 생활 기반, 예술계의 협력과 관계망, 제도적 인정과 지역사회의 지지가 함께할 때 창작은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남농 허건의 삶이 우리 사회에 전하는 예술적 성취와 경제적 안정의 조건이다.
김지훈 gn@gwangnam.co.kr         김지훈 gn@gwangnam.co.kr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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