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우리시대 ‘세한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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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문화산책] 우리시대 ‘세한도’는

한희원
서양화가

다산 정약용(1762~1836), 추사 김정희(1786~1856), 원교 이광사(1705~1777)는 우리 민족사에서 위대한 족적을 남기신 분들이다.

특히 이 세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혹독한 유배의 시간을 거쳤다는 점이다. 이 가혹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정진해 자신들의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 때의 문신이다.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으로 인해 강진에서 장기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이벽, 이승훈등과 사귀면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는데 입교 후 뚜렷한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됐다. 그는 이 기간에 학문에 더욱 매진해 실학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정치에서는 멀어졌지만 학문에서는 일가를 이루는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여유당전서 등 500여권을 저술했다. 이 책들은 지금까지 지침서가 되고 있다. 정약용의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은 우리 지역의 문화,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조선후기의 다성이라 불리는 초의 선사(1786~1866)는 다산에게 유학과 시문을 배웠다. 운림산방의 시조인 남종화의 소치 허련은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교류했으니 남도의 회화사에도 기여를 했다.

원교 이광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명필이다.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서예가로 옥동 이서, 공재 윤두서로 이어져 내려온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의 서맥에서 백하 윤순에게 서예를 배워 ‘원교체’를 완성한다. 백부의 진유사건에 연루돼 51살부터 73살까지 22년이나 길고 긴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지였던 신지도에서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오로지 서예에 몰두해 그의 서체를 완성해 나간다. 요절한 딸과 남편이 옥중에서 죽음을 당한 줄 알고 자결한 부인 등 그의 모든 불행은 끝이 없었다. 푸른 바다를 보며 오로지 글씨에 몰두하며 고통을 승화시켰다. 그의 서맥은 전주의 창암 이삼만, 기초 모수명, 설주 송운회, 송곡 안규동, 학정 이돈흥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 말기의 문신, 실학자, 금석학자, 서화가로 우리 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서화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추사 김정희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돼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에 유배됐다. 1851년에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돼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된다. 제주도의 유배는 가장 가혹한 형벌로 그 기간에 추사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였다. 문인화의 최고 걸작인 세한도(1844년, 국보 180호)를 이 때 완성한다.

세한도는 그의 제자인 이상적에게 그려준 작품으로 겨울이 돼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논어)을 느끼며 시대의 권세에 따르지 않고 지조를 지킨 제자의 절개를 비유한 걸작이다. 북청에서는 추사의 명작 ‘불이선란도’를 완성한다. 추사의 서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 두 점이 유배에서 탄생했다. 세한도는 유교정신을, 불이선란도는 불교정신을 그림의 모태로 삼아 그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할 수가 있다.

2017년 정유년도 벌써 2월로 접어들었다. 우리 민족의 앞날에 폭풍우가 밀려오는 것을 바라보자니 착잡함에 빠져든다. 이럴 때일수록 가혹한 유배지에서 자신을 더욱 갈고 닦았던 위인들을 통해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차가운 고통의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았던 소나무와 잣나무의 기상은 지금 우리 민족의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정신일 것이다. 극한의 외로움과 가혹한 형벌이 내려진 시기에 절망에 빠져있지 않고 절망의 시간을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킨 기개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기이다.

밤이 깊으면 아침이 오고 어둠이 짙을수록 빛 또한 더욱 발하는 법이다. 우리 시대 세한도가 지금 그려질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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