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마음으로 떠나는 겨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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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마음으로 떠나는 겨울 여행

한희원
서양화가

사람들은 나에게 그림을 언제부터, 왜 그렸느냐고 물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을 발견하여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여러 사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후에야 그림을 알게 되었다. 늦깎이로 그림에 매달려 미술대학을 가고 지금은 화가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난감하고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늦게 그림에 입문하였지만 전업화가의 길을 걷기까지는 어린 시절 주위환경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양림동으로 이사를 왔다. 어린 눈으로 봐도 양림동은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내가 살던 집은 언덕 위 교회 아래에 있었다. 집 마당에는 은행나무 등 많은 나무들이 줄을 이루며 서 있었다. 교회 앞에는 고목들과 미루나무, 플라타너스가 언덕을 지키고 있었다. 학교를 파하고 나면 친구들과 양림동 골목길을 쏘다니며 놀았다. 교회 마당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언덕에 줄줄이 서 있는 나무 사이에 앉아 마을을 바라보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먼 곳의 무등산은 노을에 물들어 여러 가지 색으로 변했다. 무등산과 양림동 사이로는 광주천이 유유히 흘렀다. 마을의 중앙에는 숭일 학교의 오래된 교정과 양림산의 숲이 보였다. 가끔씩 머리가 금발인 소녀가 양림산 중턱의 나무 사이에서 그네를 타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뛰었다. 그 시절 우리들 사이에서는 어떤 친구가 금발 소녀를 만나러 숨어들어 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확인할 길 없는 소문이 퍼졌었다.

하루 종일 놀다 집에 오면 곳곳에 시집이 널려 있었다. 시와 음악을 좋아했던 형이 시집을 읽다 놓아두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시를 알게 되었다. 청마 유치환의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청마의 서간문이 출판되었었다. 하루 종일 그 책을 읽고 ‘어쩌면 이렇게 시를 잘 쓸 수가 있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청마의 시 중에 ’그리움‘을 좋아했다. 양림동에는 경남의 청마와 쌍벽을 이루는 호남의 다형 김현승 시인이 있었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움이 절절히 들어 있는 청마의 시를 그때부터 좋아했다.

형은 음악을 좋아했다. 골목길 어귀에 들어서면 멀리서도 들릴 만큼 음악을 크게 틀어놓았다.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시와 음악을 항시 곁에 두고 있었다. 이런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비록 그림에 늦게 입문했지만 지금까지 숙명처럼 전업화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세월이 흘러 언덕은 많이 변했다. 옛 교회당은 헐리고 큰 교회가 들어섰다. 언덕 교회 아래쪽 양림 마을은 재개발이 되어 다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내가 살던 집도 지금은 지상에서 사라지고 그곳에는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어 흔적을 찾을 수도 없다.

다사다난했던 2017년도 이제는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이 되면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며 자신과 우리 주변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양림동의 오래된 흔적을 되새겨 보는 것도 겨울을 보내며 상념의 시간을 갖기 때문이리라. 겨울은 바람과 하얀 눈으로 상징되는 계절이다. 바람이 없는 날 흰 눈이 펑펑 내리면 추울 것 같지만 오히려 따뜻한 마음이 밀려온다. 흰 눈에 덮여 있는 설국을 보면 춥다는 생각보다는 알 수 없는 그리움과 따뜻함이 동시에 울컥거리며 밀려온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떠나는 겨울 여행은 오래 된 기억을 더 애틋하게 더듬게 한다.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를 오른 적이 있었다. 산 아래에는 봄날처럼 따뜻해 이국의 꽃들이 만발하였다. 거대한 설산 아래 도착해 산을 오르면 꽃들과 풀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흰 눈에 덮인 설산의 모습이 보인다. 안개와 바람에 쌓인 산을 오르면 영혼은 이미 신의 정원으로 들어서 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에 몸을 싣고 긴 시간을 달려 이르크츠크에 도착했을 때도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끝없는 자작나무 숲. 그 숲길을 걷고 있는 영령들의 떠도는 노래. 시베리아의 파리라 불리는 이르크츠크는 혁명의 실패자들이 유배를 통해 만든 도시이다. 긴 겨울을 녹이는 사랑의 이야기며 바이칼 호수의 신화가 설국 사이로 들려온다. 2017년이 다 가기 전에 스스로를 정리하고 돌아보는 마음속의 겨울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지.

여행은 자신과의 대화를 하는 시간이다. 겨울에 하는 여행은 다른 계절의 여행보다 훨씬 더 정적이다. 겨울 여행은 좀처럼 잊지 못하는 매력이 있다. 겨울나무들이 잎을 떨구어 온전히 전부를 내보이듯이 겨울여행은 그동안 미뤄두었던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마음속의 여행이다.

양림동의 언덕길에도 흰 눈이 쌓이면 내 마음 속의 겨울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차가운 두 손을 붙잡고 따뜻한 온기를 만들어 겨울 여행을 떠나야겠다. 아팠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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