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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가 어제를 동여매고 있다면, 달력은 내일을 동여매고 있다. 달력은 만들어진 때부터 우리 삶을 지배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 삶이 달력에 매달려 있는 형국이다. 달력은 인류의 시간과 계절 관념에 대한 경험과 지혜의 총화이기도 하고, 특별한 역사들에 대한 기록과 기표이기도 하다.
‘시간과 권력의 역사’라는 책을 읽어보면 저자 외르크 뤼프케는 ‘달력은 꿈적도 않지만 우리 삶을 통째로 지배한다.’고 적는다. 그렇지만 아주 드물게 사람들이 달력의 날짜를 바꿔버리기도 한다. 작년 12월 20일은 제19대 대통령 선거일로 빨간색으로 돼있다. 공동체의 힘은 달력의 날짜를 바꿔버리기도 한다.
연말과 연초에 달력이나 달력수첩을 선물 받는다. 기관 기업 단체 모임이나 개인이 만든 것이다. 달력을 받으면 앞으로 당도할 365일이라는 내일을 펼쳐놓고 일 년 동안의 삶의 설계를 한다. 가족 친지 지인들의 기념일들과 계획한 일들의 날짜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쳐놓는다. 달력을 받으면 설렌다.
문화재청에서는 올해 탁상용 달력과 벽걸이용 달력을 보내주었다. 2018년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재위 1418~1450)이라 세종대왕의 주요 업적을 1년으로 묶은 것이다. 달력의 전체 주제는 ‘시대를 앞선 혁신’이라고 적었다. 달력을 받고서야 올해가 세종대왕의 즉위 600주년 되는 해라는 것을 알았다.
세종대왕은 재임 기간 동안 바른 음악으로 통치했다(예악 정치-편경). 인재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경복궁 수정전-옛 집현전). 영토를 확장했다(4군 6진-세총통). 정확한 시간을 관리했다(표준시계-창경궁 자격루). 하늘을 열어 백성에게 전했다(천문 관측-혼천의). 조선 건국을 노래했다(조선 창업 정당성-용비어천가). 재난에 대비했다(농업 홍수 대비-측우기). 인쇄술을 꽃피웠다(출판문화-갑인자). 쉬운 문자로 백성과 소통했다(우리 문자 창제-훈민정음). 농업을 과학적으로 관리했다(농업기술 발전-앙부일구). 달력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종의 통치 철학은 백성과 함께 즐기는 예악 정치,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 정치, 백성들이 스스로 배워서 삶의 질을 높이는 교학과 인문 정치였고 이것은 역사 이래 우리 정치사상의 핵심이기도 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문학과 음악으로 확보하면서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여기에 인재를 키우고 신하를 널리 등용했다. 훈민정음으로 백성과 소통하고, 백성의 생명줄인 농업에 최첨단 기술을 동원했다. 영토를 확장해 백성들의 자존심을 회복했으며, 시간 관리와 재난 관리를 철저히 했다. 모든 통치 성과물들을 책으로 남기고 인문학을 꽃피웠다.
문화재청은 세종이 남긴 문화와 문화재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이 달력을 기획했을 것이다. 문화재청이 그런 문화와 문화재를 소중하게 지켜나가고 있다는 메시지도 남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1년 동안 이 달력은 책상 위에 꿈적도 않고 놓여 있겠지만 달력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1년 동안 내 삶을 통째로 지배할 것이다. 세종의 정치 철학과 그 주도면밀한 정신을 생각하며 너도 이렇게 1년 동안 문화와 실질과 배려의 삶을 살라는 메시지다.
2018년 오로지 국민을 위한, 시대를 앞선 혁신의 철학으로 일관하는 국정을 바란다. 소통의 리더십을 갖춘 사람들이 올해 지방자치 선거에서 단체장으로 선출된다면 좋겠다. 그보다 더 큰 소망은 우리네 삶이 문화적인 품격을 갖추게 됐으면 좋겠다. 사회 경제적으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속에서 남을 친절하게 배려하고 문화적 삶을 향유하며 사는 광주가 됐으면 좋겠다.
2018년 한해의 달력을 펴고 그렇게 빨간색 색연필로 세종대왕의 가르침을 새겨 넣으면서 마음이 설렌다. 우리는 모두 새로 살아야할 365일을 선물로 받았다. 감사하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