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책 읽는 사람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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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문화산책]책 읽는 사람이 아름답다

강경호
시인·시와사람 발행인

오랫동안 이용하던 헌책방 앞을 지나가는데 얼마 전까지도 있었던 서점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키가 크고 빼빼 마른 노인이 수십 년째 운영하던 서점이었다. 그곳에서 ‘한국해금문학전집’을 비롯한 몇 가지 희소한 책들을 발견했을 때는 기쁨이 컸었다. 이제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의 시대가 오는가 싶은 생각이 스쳐갔다. 깨끗하게 치워진 서점 바닥의 빈 공간이 넓고 허전해 보였다. 헌책방이 사라짐으로 인해 나의 상실감이 커진 것 때문일 것이다.

대학시절 광주고등학교 주변에 헌책방들이 제법 있었다.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어떤 충만감이 가득찼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가 읽은 책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메모가 있었다. 문장 아래 그어진 줄과 메모를 보며 먼저 책을 읽었던 사람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양 즐거움을 주곤 했다.

어떤 날은 아무 생각없이 서재에 꽂힌 오래된 책들을 펼쳐볼 때가 있다. 책 행간 사이에 그어진 밑줄과 메모에서 오래 전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상념에 젖기도 한다. 순수하고 열정이 넘치던 스무 살 언저리의 청년의 모습을 만나기도 한다. 책에 낙서처럼 남긴 흔적들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어, 그때 읽었던 책에서 그때의 나의 삶의 서사와 사유 체계의 코드들이 암호처럼 풀려난다.

책은 사람을 키운다. 그래서 정신을 살찌운다.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서 가시가 돋을 정도로 날마다 책을 읽었다. 나에게 책은 존재방식과 삶의 양식이 됐다. 누군가의 경험과 일생을 송두리째 담은 책은 성찰과 통찰을 하게 하는 눈이 있다. 그 눈으로 세상을 향해 걸어가고 인간으로 태어난 기쁨을 충만하게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점점 서점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대형 서점이 사라지고, 골목에 있었던 작은 서점들이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헌책방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어드니 서점 또한 경영난을 견디지 못할 것은 너무 뻔한 일이다.

다행히 가끔씩 지하상가에서 헌책을 교환하는 것을 몇 번 보았다. 어떤 사회단체에선 헌책을 모아 도서지역이나 가난한 아이들에게 책을 보내는 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필자 역시 1990년대부터 중국 동포 작가들에게 매년 한두 권씩 무상으로 책을 발간해 보내고 있다. 또한 헌책들을 모아 용정에 있는 한글독서사에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곳곳에 작은도서관이 생기면서부터는 여러 출판사에 연락을 해 책을 모아 기증해오고 있다. 이는 갈수록 책을 안 읽는 세태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이나 영상매체를 통해 얻는 상상력은 사고의 폭을 확장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그저 바라보고 있으면 전개되는 영상매체는 수고하지 않고 얻으려는 상상력처럼 건조하고 그냥 아무런 메시지 없이 지나가버리기 일쑤이다. 그리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모름지기 독서는 문장 아래에 밑줄을 그으며 상상력의 방점을 찍을 때 행간 사이에서 다양한 사고가 펼쳐진다. 스스로 깊은 사색을 할 수 있고 창의적인 상상력과 균형있고 내밀한 양식을 제공한다.

대학교수를 하다가 정년을 맞으면 그동안 공부한 수많은 책을 고향이나 도서관에 기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주 희귀한 책은 물론 가치있는 책들이지만, 헌책들이 고물상에서 뒹구는 것들을 볼 수가 있다. 평생 연구하며 참고문헌으로 쓰인 책들은 누군가의 일생이 배어있는 것들이지만, 도서관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헌책들은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만다.

독서인구의 감소는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데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해마다 노벨상이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우리는 고은 시인의 이름이 발표되기를 수년 째 기대했다. 나름대로 의미있는 분들이 노벨상을 수상한다. 그 분들의 작품성과와 고은 시인의 문학적 성과를 비교해 보면 고은 시인이 훨씬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곤했다. 그런데도 이름만 무성할 뿐 정작 발표되는 이름은 이방인이다. 고은 선생의 작품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보다도 뒤지기 때문이 아니다. 놀랍게도 고은 시인의 시집은 한국에서도 잘 읽지 않기 때문에 독자의 폭이 좁아 노벨문학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책을 잘 읽지 않는 국민들 때문에 우리나라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출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한 해가 다 지나가고 있다. 새해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책을 읽자’는 계획도 세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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