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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현 대동문화재단 사무처장 |
전통 기법에 현대 감각으로 디자인해 만든 찻잔이고 문인화가 멋스럽다. 선물을 건네주던 공예가의 따뜻한 마음과 찻잔의 온기가 어우러지고 문인화의 아름다움까지 감상할 수 있으니 정감 있는 생활 다기 3종 세트가 아닐 수 없다. 차를 마실 때마다 예술가와 예술의 향유자인 나 사이에 시공을 초월한 이런 공감각을 주는 것이 예술의 한 가지 본질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제는 부산에서 작은 병 하나가 소포로 날아왔다. 한 달 전에 부산시에 문화 답사를 갔다가 어떤 전시실에서 미술 체험을 했다. 한 달 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부산의 젊은 작가인 신지혜라는 설치미술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뷰자데’라는 전시명이었다. ‘뷰자데’는 ‘데자뷰’의 반대말로 ‘늘 접하는 익숙한 것이 갑자기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느낌’이라고 한다.
작가는 전시실 입구 안내 데스크에 서 있다가 작가의 뒤쪽에 전시된 다른 작품들을 둘러보고 나오는 관객들에게 ‘mP 0∞’라는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관객들은 0번부터 차례로 번호가 매겨진 라벨이 붙은 작은 병(작가는 이 병을 형이상학적인 약재-metaphysical Preparation-라고 불렀다)을 받는다. 병이 0번부터 무한대(∞)까지 준비돼 있어서이다.
작가가 병 하나를 골라주면 라벨 밑의 빈 공간에 관객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특별한 사람에게 필요한 긍정적 에너지가 담긴 단어들을 적고 그 단어를 생각하며 병 속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병의 뚜껑을 닿고, 자신이 생각하는 특별한 사람의 주소를 소포 박스에 적고 봉인한 다음 작가에게 이것을 건넨다. 개인전이 끝난 한 달 후 소포에 담긴 작가-관객 공동 작품은 특별한 주소로 소포가 돼 날아가게 된다.
작가가 독일 유학 중에 있을 때 고국에 있던 작가의 아버지는 암 투병 중이었다. 그래서 독일에서 아버지에게 필요한 긍정적인 에너지가 담긴 단어들을 라벨로 적고, 작은 병에 작가의 숨결을 담아 소포로 고국에 보냈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작가가 아버지의 치유를 바라며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경험을 고국에 돌아와 전시회에서 관객들이 추체험해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다. 사람의 숨결이 예술의 꽃으로 피어나 전 세계로 날아다니고 있는 셈이다. 아주 특별한 전시 기획이다.
작가들은 우리가 늘 그렇게 바라보는 대상과 대상의 느낌을 낯설게 바라본다. 그러면서 사물과 현상의 이면에 있는 그늘과 본질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그 본질에 대한 탐구가 진솔할 때 작품은 감동을 준다. 신지혜 작가는 젊은 작가지만 작가와 관객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작품이자 관객이 그 작품의 주인공이 되는 ‘낯선 공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아쉽고 가슴 조이는 12월이 오고야 말았다. 거리에 캐럴이 울리고 하늘은 낮게 엎드려 차가운 숨결을 땅에 불어넣고 있다. 귀가하는 골목길은 어둡고 그늘은 깊다. 괴롭고 힘든 일이 많고 시간에 쫓겨 발걸음이 귀가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이렇게 춥고 어두운 때 오히려 사람들의 성찰은 깊어지고 내면은 깊어진다. 깊어진 내면에 누군가를 초대해 기대고 따뜻함을 나누고 싶어진다.
자본주의의 타락을 낯설게 만들어 그것을 성찰하게 만들고, 자본의 일상과 속도 속에서 잠시 내려서서 우리 본래의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바로 문화가 설 자리다. 존재와 존재의 관계에 대해 반성하고 삶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충격을 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어떤 예술이든 사람을 향한 사람다움의 뜨거운 실천 행위다. 긍정의 에너지와 인간의 숨결 나누기가 예술이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형이상학적 약’이 인문학이다. 광주시민들은 예술과 문화의 힘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광주는 그래서 멋진 도시고 광주시민에게는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