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문명의 그늘과 인간의 삶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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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문명의 그늘과 인간의 삶을 생각한다

강경호 계간 ‘시와사람’ 발행인

강경호 시인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조지 오엘의 ‘1984년’는 이미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눈을 뜨면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달라져 있고 새로운 상품들이 나타난다. 새 스마트폰을 개시하는 날은 수많은 사람들이 매장 앞에 줄을 서서 눈부시고 경이로운 과학문명에 설레는 마음과 기대에 찬 눈빛을 한다. 그런데 나는 어찌된 일인지 우리 아이의 방벽에 붙여놓은 커다란 스티브 잡스의 사진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새로운 기술문명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나는 아날로그적 감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과학문명이 좀 더 천천히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과연 과학문명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지 못한 낙오자인가? 올해에만 스마트폰을 세 개나 잃어버렸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건망증 때문이지만 새로 구입할 때마다 사용법을 배우느라 한동안 낯선 스마트폰이 무섭고 그 앞에서 쩔쩔 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마트폰 없이는 단 한 시간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신호등 앞에서, 길을 걷다가, 심지어는 운전하면서도 스마트폰을 본다. 틈만 나면 그곳이 학교 강의실이건, 국회 의사당이건, 공원 벤치건, 스마트폰을 본다. 사람들이 모두 감정도 없고, 따스한 체온도 없는 스마트폰의 매력에 빠져 중독되어 버린 것은 아닐가?

문제는 갈수록 자연문명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세상과 단절시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컴퓨터에 빠져 몇날 며칠을, 그래서 방문을 잠근 채 몇 년 째 컴퓨터와 지내는 사람들도 점차 많아지고 있다 한다. 핵가족을 넘어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들도 늘고 있어 대한민국의 소멸을 예견한 사람들도 있다. 죽은 지 몇 달이 된 후 발견된 고독사를 한 사람들도 심심치않은 언론의 단골매뉴다. 문화현상에서도 세상에서 소외와 단절의 모습이 감지된다. 서정성 짙은 대중가요들의 폭이 좁아지고 그 자리에 랩이 스며드는 것을 나는 관심있게 지켜봐 왔다. 랩이라는 음악장르의 특성은 마치 혼자 중얼거리는 중얼거림의 음악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 본다. ‘중얼거림’은 상대의 눈앞이 아닌 혼자만의 공간에서 뇌까리는 행위이다. 메시지를 정확하게, 그리고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이 깃든 말을 전달하는 것이 보편적인 소통방식이다. 그런데 혼자서 허공에 내던지는 말은 의미가 없다. 소통의 방식이 아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마시고, 혼자 노래를 부르고, 혼자 잠을 자는 1인 가족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명제는 인간은 절대 혼자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갈파한 말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혼자서도 잘 논다. 즐거운 세상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사회적인 현상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과학문명의 발달과 무한경쟁사회에서 점차 도태되거나 소외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문명의 발달은 산업혁명으로 공장이 기계화되자 노동자들이 쫓겨나게 되어 기계를 파괴했던 역사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도 그때의 노동자들은 용기가 있었다. 현대에서는 과학문명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상으로 받아들여 대책없이 사회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에 인공지능과 유명한 바둑기사가 바둑을 두었는데 결과는 인간의 참패였다. 지금 세계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을 만드는데 쌍심지를 켜고 있다. 병원에서는 이미 기계를 이용하여 수술을 실시한다. 많은 인력이 필요한 공장들도 얼마 가지 않으면 인공지능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창작영역인 그림그리기와 글쓰기, 그리고 번역 등 상상력이 필요한 인문예술까지 인공지능이 해낼 날이 멀지 않았다니 이제 인간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질 것이 뻔하다.

사찰의 해우소는 왜 먼 곳에 있는지를 생각한다. 대웅전이나 요사채에서 해우소에 이르는 거리는 사색의 공간이며 인간의 길을 생각하는 시간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기계로 뺀 면보다 수타면을 선호하는 것은 단지 옛 향수를 느끼려는 버릇일까. 정성들인 손길에서 더한 맛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계로 대량생산한 물건보다 풍구질하여 일으킨 불에 무쇠를 달궈 대장장이가 망치질해 만든 농기구와 주방용품이 더 매력적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래서 장인의 손에 수없이 망치를 맞은 징이나 괭과리의 소리가 마음 속 깊이, 그리고 더 멀리 울림을 주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양희은, 송창식의 노래에 깃든 인간을 향한 정서를 통해 나의 청년시절을 눈물짓게 하고 기쁘게 했던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나는 아직도 손으로 글씨를 쓰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세련된 글씨는 아니지만 글을 쓰는 시간 나의 정신이 어깨를 타고 손을 통해 한 자 한 자 원고지에 쓸 때는 무척 불편하고 힘들지만 글 행간에 새겨진 맑은 영혼의 울림을 나는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종이책을 주로 읽는다. 사이버공간에서 떠도는 획일화된 글씨체와 진정성이 없는 글을 읽는 일이 식상하고 때로는 허무하다. 물론 내가 신는 구두 또한 수제품이니, 나는 여전히 과학문명과 디지털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문명에서 소외된 낙오자란 말인가. 취미 또한 어린시절 농가에서 쓰던 쟁기, 가래, 저울, 베틀 부속, 종자그릇, 이발소 가위, 누님이 쓰던 인두, 아버지가 쓰던 녹슨 쇠스랑과 다 닳은 괭이를 수집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과학문명을 거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무한경쟁 시대 우리 청년들의 실업이 늘어나는 현상과 낮고 가난한 사람들이 문명의 그늘에서 소외되는 것에 저항할 뿐이다. 또한 자본의 폭력에 항변할 뿐이다.

밤새 쓴 편지를 빨간 우체통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던 영혼이 순수했던 청년시절과 3대가 모여 밥을 먹고 일을 하던 농경사회가 간직한 인간을 향한 향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광남일보 기자 @gwangnam.co.kr         광남일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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