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각과 공감각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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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무감각과 공감각의 경계

강혜경 문학박사·문화기획자

강혜경 문학박사·문화기획자
[문화산책] 색은 차이를 감지하게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 언어다. 빛의 파장을 나누어 인지하는 인간의 지각은 본래부터 차이를 전제로 한다. 빨강과 파랑, 흑과 백, 온기와 냉기, 열정과 절제. 색은 문화의 상징이자 인식의 축적이며, 기능적 구분을 위한 사회적 약속이기도 하다. 교통신호등이 색으로 통제되고 지도에서의 고도나 밀도, 물리적 특성까지 색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색의 차이는 때로 매우 유용하고 효율적인 수단이다.

공공행정 영역에서도 색은 종종 유사한 기능을 수행해왔다. 대상과 금액, 사용처 등을 시각적으로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혼선을 줄이고 행정처리의 속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디지털 문해력과 무관하게 모든 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각 중심의 정보 전달 수단으로서 색은 간명한 효용을 가진다.

그러나 어떤 색의 구분은 기술적 효율을 넘어서 정서적 위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특히 그것이 ‘사람’에 대한 정보를 색으로 구분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 그 색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사회적 해석의 도구가 되며 때로는 낙인이 된다.

최근 광주광역시가 지급한 민생회복 소비쿠폰이 그 사례다. 지급 금액에 따라 분홍색, 연두색, 남색으로 나뉜 선불카드는 의도와 달리 사용자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카드의 색만으로 지원 금액이 노출되고 수령자가 어떤 정책 대상자인지가 유추될 수 있는 구조였다. 정책의 설계 단계에서 색상의 구분이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실제 사용 현장에서 카드 색이 수혜자에게 불편을 유발하고 사용을 주저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이 정책이 누구를 중심으로 설계되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번 논란이 발생한 지역이 다름 아닌 ‘인권도시’를 표방해온 광주라는 점은 문제의식을 더욱 깊게 만든다. 5·18의 역사 위에 세워진 인권의 도시, 시민 자존의 뿌리를 가진 광주가 정작 행정 조직 차원에서는 ‘인권 감수성’에 둔감했다는 사실은 구조적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인권이 도시의 상징이자 정체성이라면 그것은 기념사업이나 선언과 기치에 머무르지 않고 행정의 가장 일상적인 층위에서 실현되어야 할 원칙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행정의 효율성이 인권의 세심함을 앞선 결과였다. 카드 색이라는 기술적 장치가 인권의 문제로 전환된 것은 실은 인권이 행정의 우선순위에서 얼마나 뒤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였다. 물론 악의적인 구분이 아닐지라도 누구도 그것이 불편할 수 있다고 예감하지 못한 채 결정되었다. 이것이 바로 감수성의 결여이고 문화적 맥락에 대한 무지다.

하지만 이 사안은 단지 색의 문제도, 카드의 문제도 아니었다. 결국 그것은 사람을 어떻게 감지하고 기억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며 제도가 일상에서 어떤 감정의 파장을 일으키는지를 미리 헤아리지 못한 감각의 공백을 드러낸다. 행정의 논리는 기능으로 완결되었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보다 먼저 반응한다.

우리는 색상을 통일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수습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정작 그 색을 처음부터 나누는 데 아무 의문도 갖지 않았던 사고방식은 여전히 구조 깊숙이 남아 있다. 감각은 논리보다 앞서 도착하고 감정은 논리보다 오래 남는다.

제도가 사람을 향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감정이 제도 안에서 어떻게 울리는지를 함께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같은 카드를 당당히 꺼낼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는 이유 없이 시선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조건에서도 서로 다른 반응을 이끌어내는 이 차이를 미리 느끼는 능력, 바로 이 지점에서 감수성은 출발한다.

공감각이란 단순히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을 자극하는 신경적 현상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감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타인의 경험을 자기 안에서 일으키는 감정의 상상력이다. 색을 보고 감정을 읽고, 침묵에서 목소리를 듣는 능력, 이것이 제도 설계자에게 요구되는 다음 단계의 감수성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색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색으로 구분하지 않아도 되는 질서를 그리는 일이다. 사회는 기호로 구분되지만 사람은 감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감각이 타인의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공감’에서 ‘공감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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